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열다섯 살 소녀의 조숙함은 처한 상황에서 오는 것일까. 어머니는 성공을 꿈꾸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베트남)로 옮겨왔으나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족은 가난한 백인으로 생활하게 된다. 가족의 몰락이라는 현실, 가난한 백인이라는 상황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소녀는 검은 승용차에 탄 사람이 부유하다는 것을 알아본다.(“우아한 그 남자가 리무진에서 내려 영국제 담배를 피운다.”, “중국인. 그는 식민지의 개인 소유 부동산을 거의 다 장악하고 있는 소수 중국계 자본가들 중 하나다.”) 사춘기 소녀와 부유한 중국남성 간의 열정적인 사랑. 남성은 자신의 능력으로 부자가 아니라 아버지의 능력으로 부유했기에 소녀를 반대하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 절망을 안고 시작한 이들의 관계는 고통인 동시에 사랑이다.
소녀는 왜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중국 남성과의 사랑에 뛰어드는가. 어린 창녀임을 자처하며. 무력감, 자기혐오, 절망, 슬픔, 어머니의 편애로 인한 애정결핍, 삶이 주는 공포, 경제적 안정의 필요성, 다른 가족 구성원의 곤란함 등(작가의 다른 책 <태평양을 막는 제방>에서 주인공 소녀는 오빠에게 성능 좋은 축음기를 마련해주고 싶어서 부유한 남성 조씨에게 자신의 몸을 보여준다.)
나는 더 이상 원주민용 버스로 여행하지 않게 될 것이다. p44
그이에게 500 피아스트르를 달라고 했어요. p33
나는 늙어 있었다. 불현듯 나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p59
가난으로 인한 어머니의 불운과 광기는 소녀에게 드리워진 그늘이고 어머니의 돈에 대한 소망은 소녀의 소망이다.(“어머니의 불행이 꿈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었다.”) 어린 나이의 소녀에게 다이아몬드반지를 사주는 남성. 어머니가 바라는 세계에서 온 남성, 소녀의 가족이 출입하기 어려운 고급식당에서 밥을 사줄 수 있는 남성. 어머니는 소녀와 남성의 만남을 방조한다. 암묵적인 방조를
자신이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일찍 알게 된 소녀(“가난이 우리 집의 사면 벽을 허물어뜨려 버렸기 때문에”, “나의 삶은 아주 일찍부터 늦어 버렸다.”) 사춘기 소녀의 생에 대한 우울감과 무기력증은 기이한 열정 속으로 빠져드는 연료이다.
그건 아마도 보호자와 비슷하다. 아기라 불러주고 부드럽게 씻겨주고 사랑한다 속삭이고 소중하게 대해주고. 소녀가 어머니에게 또는 아버지에게 받지 못한 사랑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주장하지 않는다. 보여준다. 어떤 기이한 열정을. 그 열정이 꼭 올바른 방향으로 뻗지는 않더라도(뒤라스에게 그것이 올바른지 아닌지는 상관없는 듯싶지만)
가난(어린 시절)과 알코올 의존증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작가 존 윌리엄스와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작가는 자기 안에 갇힌 자들이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작가는 트라우마 안에서(어둠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는) 글을 쓰며 살아나갈 힘을 얻고 독자는 그런 작가의 글을 읽으며 세상을 살아나갈 힘을 얻는다.
어린 시절의 고통 속에서 뒤라스는 기이한 열정을 끌어올렸고 존 윌리엄스는 <스토너>라는 수동적 인물에서 의미를 찾았다.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는 삶에 만족했다(존 윌리엄스는 전쟁을 경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