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세계

강지나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by 북남북녀

<손석희의 질문들>에서 문형배 재판관은 사법 시험 2차 통과 후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공장에서 한 달 반 동안 일한 월급봉투를 공개했다. 전망도 없고 계획도 생각할 수 없는 그곳은 어느 사람에게는 정류장일 수 있으나 어느 사람에게는 종착역일 수 있다. 그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문형배 재판관은 한숨으로 표현한 듯하다. 더 이상을 꿈꿀 수 없는 척박한 현실에 갇혀 있는 자들에 대한

자본으로 움직여 가는 세상에서 재화의 부족으로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구조가 어느 이에게는 불공정, 불평등으로 다가오지만 어느 이에게는 당연한 구조이기도 하다. 억울하면 먼저 능력을 갖추라,는 말을 할 수도 있다.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는 빈곤 계층 청소년 여덟 명을 고등학교 영어교사인 저자가 십 년 동안 지켜보며 추이를 기록한 책이다.

여덟 명 중 한 명인 지현의 경우 어머니는 고아원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이다. 아버지의 폭력에 어머니는 지현과 동생을 데리고 집에서 나온다. 식당, 청소 일을 하며 아이들을 키워낸다. 지현이 일곱 살 되던 해 지현의 어머니는 사고를 당해 일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지현의 어머니는 동사무소에 찾아가 하소연하고 기초생활수급자와 장애판정을 받는다. 경제적, 사회적 기반이 전혀 없는 지현의 가족은 절대 빈곤 상태였으나 어머니는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여(정부기관, 사회단제, 종교단체 등) 꿋꿋하게 살아간다. 어머니의 이러한 노력으로 지현 역시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당당하게 후원을 요청하며 공부한다. 대학입학을 앞두고 지현은 간호와 사회복지에서 고민하다 사회복지를 선택한다.

지현뿐만이 아니라 가난한 환경 속에서 적절한 돌봄을 받지 못하고 성장한 여덟 명중 다른 한 명인 소희 역시 종합사회복지관 선생님의 도움으로 대학에 문을 두드리며 사회복지를 선택한다.


간호와 사회복지를 두고 고민하는 지현에게 주변 선생님들은 모두 간호를 추천한다. “백 퍼센트 취업이고 돈도 많이 버니까”가 이유다.

“가족 공동체가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야 자녀가 중산층 이상의 사회, 경제적 지위에 성공적으로 진입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럴 여유가 없는 가정의 자녀는 고부가가치 산업에 진입할 수 있는 고스펙을 쌓지 못하여 저소득 혹은 주변부 노동시장에 머무른다.

저소득 가정의 자녀들은 학령기 때 방임될 가능성이 많으며 적절한 돌봄을 제공받지 못한다. 경제적 안정을 위하여 접근성이 좋은 직업에 머무른다. 이것이 나쁘다기보다는 책의 표현처럼 빈곤이 단순히 낮은 소득이 아니라 개인이 가치 있게 여기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실질적 자유가 제한된다는 것에 있다.

가족 공동체의 지원이 가능한 환경이면 일찍 아르바이트를 시작해 학업에 지장을 받을 필요가 없다. 직업과 바로 연결되는 학과를 선택할 이유도 없다. 자신의 적성을 탐색하고 욕구를 살피며 가치 있다고 여기는 방향으로 삶의 한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지현의 경우 지현의 어머니는 자신의 상황을 파악하고 정부에 사회단체에 적극적으로 후원을 요청한다. 지현 역시 가난을 부끄러움으로 생각하지 않기에 주변인들에게 자신의 사정을 숨기지 않는다. 일부 사람들은 지현을 이해하지 못하고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저자는 가난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현상일 뿐이지, 내 잘못도 죄도 아니기 때문에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지현이 간파하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가난을 극복하기 위한 지현의 전략이 영리하고 훌륭했던 것은 세상의 편견과 시선에 굴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추구해 나갔다는 점이라고.

어머니가 속한 계모임에서 계주가 도망가며 위기에 봉착한 적이 있다. 파산신청을 알아보는 자녀들에게 아버지는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지 왜 안 갚아? 벌컥 소리쳤다. 계모임을 위하여 어머니는 여기저기서 돈을 빌렸으며 어머니의 말을 듣고 계모임에 참여한 사람도 여럿이었다. 계주는 도망갔으나 어머니는 빚을 떠안았다.

아버지는 그 꼬장꼬장한 성격으로 홀로 가난을 떠받치고 있었다. 초등학교도 가보지 못한 아버지는 부모에게 지원받을 수 없었으며 식구 많은 집안의 장남으로 어린 시절부터 노동의 세계에 들어섰다. 국가에 가난을 호소하겠다는 생각이나 제도에 기대려는 생각은 아버지 사전에 없었다.

더 이상을 꿈꿀 수 없는 생존을 위한 노동세계가 아버지 삶의 종착역이었다. 추운 겨울 한 낮 아버지는 쓰러졌다. 십 대가 되기 전 시작한 아버지의 노동은 생명이 꺼지며 끝을 맞았다.

나는 가난이 사회구조적인 문제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내가 아는 세계는 나에게만 영향을 미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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