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자판기

by 북남북녀

요술을 부린 건 아니다. 음료 한 개를 공짜로 먹게 해 주세요. 기도해 본 적도 없다. 기도 같은 게 터무니없다는 것 정도는 아는 나이다. 갈색 벽돌로 이루어진 마을 구민 회관에는 캔 음료 자판기가 놓여 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특별할 것 없는 푸른색 자판기다.

회양목이 둘러싸고 있는 미니정원에 길게 의자까지 놓여있기에 갈 곳 없는 동네 아이들의 아지트 같은 곳이다. 연합고사 백일주를 마신 곳도 첫 미팅 후 모여 앉아 품평회를 나눈 곳도 오다가다 길에서 아는 이를 만나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발길이 흐르는 곳도 이곳이다.

우연히 길에서 S를 만났다. 우리의 발길은 구민회관으로 향했고 500원 동전 하나를 들고 자판기 앞에 섰다. 비장한 표정으로 S가 동전을 넣는다. 손가락에 힘을 주고 콜라 캔 버튼과 식혜 캔 버튼을 동시에 꾹 누른다.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캔 음료가 아래로 내려오고 투명한 플라스틱 뚜껑을 들어 올려 음료 두 개를 꺼낸다. 성공!

자판기는 우리만 아는 비밀이 있다. 타이밍을 맞춰 버튼 두 개를 동시에 누르면 음료 두 개가 나온다. S와 나는 차가운 음료를 하나씩 쥐고 건물 계단을 오른다. 옥상 문이 있는 5층까지 올라 철퍼덕 바닥에 앉는다. 무더위에 건물 밖 의자에 앉아 있기는 힘들다. 통 창으로 파란 하늘이 눈앞으로 뻗어 나간다.

너희 담임은 어때?

말도 마. 노력장 매일 두 장씩 내야 해. 교과서를 그냥 쭉 읽는 편인데 억지로 막 쓴다니까. 굳은살 박힌 거 봐라.

우리 엄마는 반찬에 신경을 안 써. 냉장고 열면 김치뿐이야. 요즘에는 도시락도 안 싸줘서 내가 계란프라이 해서 싸간다니까.

난 원래 내가 쌌는데. 체력장 한다고 할 때는 두 개나 쌌잖아. 연습한다고 아침 일찍 애들이랑 모여서 공원에서 먹었어. 아침에 먹으니까 맛있기는 하더라.

저번에 열날 때는 어쩐 일로 엄마가 열나니 묻더라. 생전 그런 거 몰랐거든. 화장실에 갔다 왔는데 내가 신은 슬리퍼가 뜨끈하더래. 덕분에 그날은 남자 친구를 부르지 않더라고. 엄마 남자 친구가 집에 오면 기분이 정말 더러워. 안 그래야지 하면서도 그래. 딸한테는 관심도 없고.

바닥에 앉았던 우리는 누웠고 이어지던 이야기는 잠잠해졌다. 차가운 기운에 눈을 떴을 때 파랗던 하늘은 파스텔톤의 노랗고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보이는 빛을 멍하니 눈에 담다가 야, 나 잤나 봐. 나도. S와 나는 서로를 보며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얼른 가자, 엄마한테 혼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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