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오는 손님, 갑자기 만나게 된 친구, 갑자기 내리는 비에 철렁한다. 우와라는 탄성이 나오는 사람이면 좋겠는데 아, 어쩌지라는 반응이 먼저 나온다.
최근에 아, 어쩌지 라는 날이 있었다. 눈에 띄지 않는 아지트였던 곳이 길 한가운데로 옮겨진 느낌, 많은 사람들이 지나갔다. 날은 흐리고 아이는 블록을 하자고 손을 잡아끄는데 ‘아, 어쩌지 무섭다’ 하는 날이.
중학교 때 갑자기 내 번호를 부른 영어 선생이 물었다.
"Open the door, please" (문을 열어 주세요)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영어 선생이 다시 말한다.
“Close the door, please"(문을 닫아 주세요)
나는 어떻게든지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서있었다.
영어 선생이 다시 말한다.
“이 학생은 지금 전혀 못 알아듣고 있죠?”
언제나 그렇듯이 지나간다. 기분이 어떻든 상관없이. 땡땡 수업 끝나는 종이 울리고 나만 빼고 다른 아이들은 여느 때와 같은 쉬는 시간을 보낸다. 나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쉬는 시간을 보낸다.
중학교 때 갑자기 담임은 내 이름을 말한다.
“어떤 아이가 있는데 수학 스무 문제 중에 맞은 개수가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
아이들은 나를 쳐다본다. 내 얼굴은 시뻘게진다.
땡땡 종례 끝나는 종이 울린다. 담임은 드르륵 문을 열고 나가고 아이들은 집에 가려고 책가방을 챙긴다. 어느 때나 다름없는 부산한 풍경이다. 오후 햇살에 둥둥 떠 있는 먼지까지도.
비염도 없는 나는 기침이 나오려 한다. 쿨럭, 쿨럭.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지만 나는 내가 너무 신경 쓰인다. 말하자면 나쁜 쪽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쿨럭, 쿨럭. 기침을 한다. 먼지에 예민한 척.
시험 전 날이면 잠을 잔다. 그것도 아주 푹, 평상시보다 더 오래. 공부하는 시늉이라도 한다면 전전날 까지다. 전날은 책을 덮는다. 공부를 전혀 못했더라도 마찬가지다. 심장이 쿵쿵 울려서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암기도 못한다. 쿵쿵 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잠 속으로 빠져든다. 아플 때처럼 잔다. 사실 아픈 거나 마찬가지다. 긴장으로 온몸이 굳어 있으니.
내 시간은 많은 잠으로 채워진다. ‘갑자기’ 나를 향해 오는 것들에 우와라는 탄성으로 마주하기보다는 ‘갑자기’ 오는 것들을 어떻게든지 피하려고 잠에 빠져들다 보니. 잠이라는 망각이 보약이다. 삶의 긴장증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는. 둔하고 무기력해져서 그냥저냥 살게 된다.
어느 때와 같이 잠든 한 낮, 캄캄한 방으로 할머니가 찾아왔다. 차르르 커튼이 쳐진다. 뭐야 라고 말하며 눈을 비비는데 할머니가 찰싹하며 등을 후려친다.
“날 좋을 때 볕도 봐야지!”
하얗게 쏟아지는 빛에 눈이 부신 날.
아무 생각 없이 새벽에 잠이 깼다. 아무 생각 없이 시간표를 챙긴다. 미술이 들어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전 시간에 못한 미술 작업을 한다. 스텐실 기법을 배우고 있어 칼로 종이를 오려 도안을 만들어야 한다. 파란색 부분을 오리고, 빨간색 부분을 오린다.
아무 생각 없이 오리던 종이를 챙겨 책가방을 싼다.
중학교 미술 시간, 아무 생각 없이 새벽에 만든 도안을 색으로 찍어낸다. 미술 선생이 책상 사이사이를 돌아다니며 쭉 훑는다. 땡땡 수업 끝나는 종이 울리고 선생은 나가면서 잘한 사람 다섯 명의 번호를 부른다. 정신이 번쩍 난다. 다섯 명 중에 내 번호가 있다. 옆 짝꿍이 네 번호 나왔어, 다시 한번 말해준다. “응” 대답한다. “응”이라고.
지금도 아무 생각 없이 새벽에 일어난다. 아무 생각 없이 책을 뒤적거리고 아무 생각 없이 마주친 구절에 우와 탄성이 나온다.
“글씨기의 목적은 살아남고 이겨내고 일어서는 것이다. 행복해지는 것이다.”
스티븐 킹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아무 생각 없이 숙제를 했다. 글쓰기 숙제를. 아무 생각 없이 상을 받았다.
학창 시절 통틀어 처음이자 마지막인 상이다.
비염 걸린 듯 쿨럭거리고 얼굴이 빨개지는 날이 대부분 이었지만 강제로 젖혀진 커튼에 눈이 부신 듯한 날이 하나씩 껴 있다. 그 하나를 잡는다.
가끔은 볕 드는 날도 있어야지. 대부분 캄캄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