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다. 더워. 많이 덥다.
언제부터인가 '기후난민'이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나 때문 인가?
내가 무얼 잘못했지.
떠올려보니 자가용 이동을 많이 했다.
그래서 30분 이내의 거리는 무조건 걷기로 했다.
오늘은 그림 그리러 가는 날.
그런데 벌써부터 외기온이 34℃가 넘는다.
그러나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걷기로 했다.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한 낯 땡볕을 다시 걸었다.
신호등 하나 건너기가 벅차게 더웠다.
하는 수없이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의 그늘 터널 길을 선택했다.
한 중년 아주머니가 바퀴 달린 캐리어에 오이자루를 싣고 낑낑대며 오고 있다.
뒤따라오던 초등생엄마가 바닥에 끌려 흘러내리는 오이를 가리키며 일러 준다.
(아직 서울이 살만한 이유 1_ 스치는 인연이지만 타인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이가 있다는 것)
잠깐 멈추어 선 중년 아주머니는 구멍 난 망에 다시 오이를 쑤셔 넣고 그냥 떠나려 한다.
때마침 근처 그늘에 앉아 담소를 나누던 어르신 두 분이 중년 부인을 불러 세운다.
'이봐요. 또 떨어지겠어. 잠깐 쉬어서 잘 정리해서 싣고 가요'라고 소리치신다.
지나치려다 뒤돌아보니 오이망에 구멍이 두 개나 나 있다.
성능이 좋지 않은 캐리어, 억지로 매달려 있는 오이망, 그리고 흘러내린 도수 높은 안경을 연신 추켜올리는 아줌마까지 모두 것이 힘들어 보인다. 어쩔 수 없다. 지금 현재 이곳에서 내가 제일 젊어 보인다.
"잠깐만이요." 하고 오이망의 구멍 난 쪽이 위로 가게 돌려 올리고, 망이 끌리지 않게 무게균형을 맞춰 반듯하게 세워드렸다.(아직 서울이 살만한 이유 2_무관심으로 방관했던 나의 태도를 바꾸게 한 어르신들)
"아이고~ 고마워요. 오이라도..."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부득불 오이 2개를 건네주고 가신다.
(아직 서울이 살만한 이유 3_작은 일에도 감사의 마음을 전달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어르신들이 '받아요'하신다.
받아 든 오이를 어르신에게 하나씩 드리니, 두 분이 한 개를 갈라 드신다고 하시며 나 보고도 날도 더운데 앉아서 물대신 먹고 가라 하신다.(아직 서울이 살만한 이유 4_더위극복을 위해 함께 나누기할 수 있는 분이 있다는 것)
그런데 이런 것이 정말 '아직 서울이 살만한 이유'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런 것은 인간관계에서 기본적인 것이 아닌가.
아니다.
이제는 대인관계에서 기본적인 것이 사라진 지 오래다.
가끔씩 삭막한 인생살이의 탓으로 이야기할 수는 있을 망정 대인관계의 기본 요건으로 강요할 수는 없다.
이유 1 관심 가져주니 살만하다.
이유 2 방관태도를 고쳐주는 이가 있으니 살만하다.
이유 3 작은 일에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있으니 살만하다.
이유 4 함께 나누기해 줄 사람이 있어서 살만하다에 동조해야 할 강제성은 없다.
그러나 확실한 건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감사의 따뜻한 메시지는
전해지면 좋을 누구에게나 필요한 정서감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삭막하기만 할 것 같은 이 도시에 아직 이런 정서의 흐름을 나눌 수 있으니
서울이 아직은 살만한 도시로 분명하지 아닐까.
아직은 서울이 살만한 곳이라는 것에 아낌없이 한 표를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