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가족과 나의 연결 고리

내가 최초로 사랑한 남자를 보내며_조카의 결혼식 날 새벽

by 마담 삐삐

우리는 '허약국집 딸들'이다.

세 자매는 참 다르고 다른 삶의 선택을 하였다. 자라면서 늘 뭐든 잘하고 예쁘고 똑똑한 얼음공주 큰언니, 너그럽고 시원시원한 사교적 성격의 손재주의 달인 작은언니, 항상 염세적이고 불만이 많은 나. (군인인 남동생이 하나 있어서 딸부잣집 된 사연은 덧붙이지 않아도 될 듯.)

시간은 어릴 때는 느리게 가는 것 같지만 어느새 초등학교 때 큰언니가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대구로 가고 이어 중학교 갈 때 작은언니는 경주로 진학했다. 그리고 내가 고등학교를 갈 때 드디어 다시 언니들과 다 같이 살게 되었다. 자취방 하나에 셋이서 울산에서 지냈는데 언니들의 연애사를 덕분에 가까이서 봤다. 큰언니는 지금 형부를 만나고 있었고 직장인인 형부와 꼬맹이 처제가 꿍짝이 맞아서 만화책을 산더미처럼 빌려서 보고 가끔 외식도 했다. 나도 입시 준비에 정신이 없었고 언니는 부모님의 반대를 피해 결혼까지 가느라 고생이 많았다. 다 담지 못할 눈물이 언니에게 있다. 그 시절의 큰언니를 만나면 꼭 안아주고 싶다.


언니는 마침내 부모님을 꺾고 결혼을 하였다. 그리고 나는 대학을 갔다.

대학을 가고 술 퍼마시다 막차를 놓친 나는 어차피 다음날 일찍 가나 늦게 가나 죽었다는 심정으로 또 퍼마시고 막차를 탔다.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하... 어찌나 무거웠는지. 약국에 들어가자마자 아버지 잘못했어요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아버지가 느 언니 왔다 소리를 쳤다. 네? 언니요 꿈뻑꿈뻑하는 나에게 느언니 애 놨다.

남은 취기가 사라지고 바람처럼 달려가 언니와 언니의 아가를 만났다. 언니가 만삭인 상태였지만 병원에 간다는 말이 없었는데 그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다.

조리원에 가지 않고 바로 집으로 데려와서 부모님이 구완을 했다. 태어나느라 붉게 물든 아가의 얼굴과 오물거리는 입, 조그만 손가락과 발. 종종 언니의 임신한 배를 톡톡 건드리면 귀찮은 듯 나를 피해 도망치던 녀석이 눈앞에 있다니. 아버지는 갓 태어난 조카의 모습 때문에 딸의 최초 외박 따위 다 잊어버렸다. 오우, 이게 왠 일이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의 조카는 태어나자마자 아버지 화에 죽을 뻔한 이모를 구했다.


아장아장 걷고 제법 말을 할 동안 곁에 있었지만 나도 성인이 되어 경주를 떠났다. 서울에서 가장 그리운 얼굴은 부모님이 아니라 나의 조카들이었다.(3년 뒤에 둘째가 태어났다.) 집에 갈 때마다 조카 줄 책을 고르며 교보문고를 다닐 때가 그렇게 신이 났다. 늘 혼자라는 느낌으로 이십 대를 보냈는데, 불만과 분노가 세상으로 향했고 부모님의 어떤 요구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그럼에도 어머니가 편찮으시니 신경이 쓰였고 가난은 나를 종종 지치게 했다. 모든 연결도 다 끊어버리고 혼자 살다 빨리 세상을 정리하고 싶은 우울이 차라리 반가웠다. 그런 나의 삶이 누군가, 내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존재가 나의 조카였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기에 힘들었던 가족이 그래서 선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조카를 보며 자연스럽게 했다. 가족이란 카르마를 내가 다시 열고 싶지 않아 나의 가족을 만들지 않았지만 대신 내게 연결된 귀하고 귀한 아이들을 보면서 '저절로 웃음이 난다'가 무슨 말인지 알았다.

친구의 아이들, 동네의 누군가의 아이가 아닌 나의 조카라니. 내가 맘껏 이름 부르고 사랑해도 되는 존재들이 내게도 있구나 생의 한가운데 점을 찍는 그 느낌. 마지막 숨이 넘어갈 때도 조카들 이름에 하나씩 고맙다 붙이게 될 그런 존재들이다. 언니들이 아이들을 키우면서 고생했지만 한결 더 성숙한 사람이 되고, 그사이 화가 좀 가라앉은 셋째도 조금은 타인의 얘기를 듣는 시늉은 한다.

우리 세 자매가 나이 들면서 만나는 횟수가 늘고 자주 그리워하며 같이 여행도 다니고 늙어가자는 얘기를 한다. 모든 것이 어쩌면 조카들 덕분이다. 언니들의 고군분투는 결국 타인에게 열리는 품을 넓혔고 조카들에 대한 사랑이 나를 가족이라는 바운더리로 데려왔다.


이 새벽 잠들지 못하고 쓰는 이 글을 쓰는 오늘. 나의 사랑하는 큰 조카가 짝꿍을 만나 결혼을 한다.

조카에게 경제적인 도움 한번 준 적 없고 바른 소리만 할 줄 알았지 재미없는 이모가 난데, 너는 참 고맙게 잘 크고 잘 자라 여기까지 왔구나.

큰 조카는 궁금한 것이 많아서 질문이 많았다. 큰언니가 나만 가면 잘 왔다며 조카의 질문받이를 시켰다. 온갖 것이 다 궁금한 그 아이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치를 알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왜 그렇게 되는지, 왜 이래야 하는지, 그것은 어디서 그렇게 시작되었는지. 요거 봐라 완전 인문학 재질인데 싶어 종종 철학책 같은 인문, 사회과학 쪽을 슬슬 던져주며 대화를 했는데 곧잘 따라왔다. 책 좋아해서 잠도 안 자고 보던 녀석이 혹시 문학 관심이 있나 한번 슬쩍 살펴봤으나 그건 아니었다. 내 욕심이었던 것 같다. 하하하..

사회과학, 철학에 관심이 많은 조카는 마침내 글 쓰는 기자가 되겠다며 공부를 하고 시험을 보러 다니며 필요하면 일단 연락하고 찾아갔다. 거절당하더라도 시도하는 긍정마인드가 세상 그렇게 부러울 수 없다. 멘탈이 보통이 아니다. 내게 없는 것을 갖고 있는 조카는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그 아이는 모를 것이다. 겁 많은 이모가 두려워서 숨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 저를 만나면 너의 마음 참 좋구나 나도 조금 힘을 내봐야지 했다는 것을. 꼬맹이가 청소년이 되고 대학생이 되고 사회인이 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동안 덕분에 나도 조금 더 좋은 어른이 되려고 노력했다. 그래야 아이에게 더 좋은 세상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부끄럽지 않은 이모로 설 수 있으니까.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애쓴 것은 다 네 덕분이라 참 고맙다는 말은 언젠가는 해야지 했는데 오늘에서야 비로소 그 말을 한다.


차분하고 심지 깊은 짝꿍을 만나 새로운 삶을 꾸려가는 조카의 앞날이 마냥 순풍만 있겠나. 그럴 리가.

그럼에도 나는 둘의 심지가 엮여 더 단단해지고 다양한 색깔이 얹힐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노년의 내가 멀찍이서 둘이 사는 얘기 건너 들으며 잘 늙어가려 애쓸 것 같다.

어린 조카가 아니게 될 너에게, 아니 이미 어리지 않은 조카에게.

너로 인해 지난 삼십여 년이 마음 한구석 꽉 찼음을 짝사랑을 보내는 심정으로 이모가 고백한다.

사랑하는 우리 쭈니, 즐거운 오늘을 맘껏 살기를.

행복과 즐거움을 내일로 미루지 말고 오늘 하루 서로에게 최선을 다해 사랑한다 말하며 살기를!

두 사람이 각자 한몫의 사람임을 잊지 말길!

서로를 위해 희생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살피며 대화하며 살기를!


무조건 사랑이 이런 것이라는 걸 처음 알려준 존재가 조카였고 내가 타인을 사랑하며 살 수 있도록 교육 없이 배움 받은 최초의 존재였다. 정말 고맙고 사랑한다. 난 이제 너의 엄마 멘탈 챙기러 가야겠구나.

이따 예식장에서 보자.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아름다운데 왜 눈물이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