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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합격의 이유

by 피라

오래 전, 내가 다닌 기업은 채용 서류의 보관 기한은 <영구>였다. 지원자의 입사 지원서, 채용과정의 내부 결제 자료, 면접 내용을 기재한 개별 면접사정표와 최종 합격 여부가 기재된 종합 면접 사정표 등의 채용 자료는 기업이 망할 때까지 보관한다는 뜻이다. 최근 채용 과정의 공정성 시비 때문에 채용 서류는 더욱 중요해졌다. 채용 서류를 중요하게 여기고 영구 보관한다는 것은 필요하면 언제든 공개할 수 있으니 이에 대비하기 위함이 아니다. 채용 서류를 외부적으로 공개하는 것과 내부적으로 보관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내가 일할 때는 요즘처럼 사흘이 멀다하고 채용 절차와 내용의 문제, 공정성 문제가 보도되고, 소송에 휘말리며 기업 이미지가 한 순간에 추락하는 일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부적절한 채용 절차와 기준, 부적절한 면접 질문 등의 문제가 있어도 지원자들은 순한 양처럼 떨어졌다고 하면 그런 줄 아는 시대였다. 그때도 채용 서류는 영구 보관했다.


자신이 왜 떨어졌는지 밝히지 않으면 트럭을 몰고와 기업 정문을 박살내겠다거나, 자신이 10만 팔로워의 인플루언서니 소형 원자폭탄 같은 파괴력을 장착한 글로 사회적 이슈로 만들어버리겠다는 협박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시절에도 채용 서류는 영구 보관했다. 이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혹시나 생길지도 모르는 채용 문제에 대비해, 채용의 근거가 사라지지 않도록 기업이 폐업할 때까지 관리한다는 의미다. 보관의 이유는 필요할 때 외부에 공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런 일이 생기기 않기를 모두 바라지만, 언젠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내부적 목적 때문이다. 둘째는 기업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인 함께 일할 사람을 뽑는 일은 관련 서류를 영구 보관할 정도로 중요하다는 상징적 의미다. 기업 행위는 내부 구성원이든 외부 고객이든 사람에 대한 일이고, 채용은 HR의 시작이니 채용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심오한 의미가 <문서보존연한 영구>라는 무시무시한 딱지에 담겨 있다. 다양한 기업 상황이나 오너의 철학에 따라 이 외에도 영구보관의 다른 이유들이 있을 거다. 기업에서 2,000명 넘게 채용한 경험으로 보건데, 언급한 두 가지 이유는 채용 서류 영구 보관의 여러 사유 중에서 포유류의 척추뼈같은 이유라 여겨진다. 날이 갈수록 점점 중요해지는 채용의 공정성 시비에 대비해 온 세상에 낱낱이 공개해도 문제 없을 공정한 채용의 근거가 빼곡히 준비되어 있다 하더라도, 채용 서류 공개를 두려워하지 않을 기업은 단 한 곳도 없을 거라 단언한다. 왜냐하면 채용 공정성에 대한 진정성이 아무리 줄줄 흘러넘쳐도 완벽할 정도로 공정한 채용 절차란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내가 일하던 2000년 초까지만 해도 대기업도 아웃 소싱 없이 직접 채용했다.(당시 삼성이 선도적으로 채용을 일부 아웃소싱하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채용 공고문에 기업 인사 담당자 유선 전화번호가 떡하니 기재되어 있었다. 아무나 전화를 하면 인사팀 담당자와 통화할 수 있었다. 대기업도 그런 인간적인 시절이 있었다. 채용 공고가 나가면 인사팀은 동사무소의 민원실로 변했다. 채용 공고를 본 사람들의 문의 전화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입사 지원에 관한 문의 전화를 받느라 업무가 마비되었다. 어떤 서류를 제출해야 하는지 묻는 전화에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았다. 제출 서류가 채용 공고에 명시 되어 있는데도 꼭 전화를 해서 뭐가 필요한 지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치 우리를 골탕 먹이려는 같았다. 필요한 서류가 무엇인지 물어보는 전화를 받으면, 상대가 들리지 않게 수화기를 돌려 한숨을 푹 쉬고는, "이력서, 자기소개서, 주민등록등본, 졸업 증명서, 자격증 사본...." 이라며 필요한 서류를 하나하나 또박또박 말해주던 기억이 선하다. 내가 다니던 기업은 거의 일년 내내 채용 공고가 나가고, 채용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일년 내내 지원 희망자,지원자, 면접 전형 예정자, 결과 통보 예정자들의 문의 전화에 시달렸다. 항상 반쯤 탈진한 상태에서 사무적이고 기계적인 친절함으로 전화를 받느라 중요한 업무는 저녁 8시 이후에 시작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그 시절 평균 퇴근 시간은 밤 11시였고, 하루 12시간 일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한 동안 말도 안되는 민원 업무를 하다가, 전화를 받고 채용 업무를 돕는 지원 인력을 따로 뽑았다. 인력이 모자랄 때는 계약직으로 지원 인원을 늘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중요한 전화(인사 담당자가 말해 줘야 하는 질문을 하는 경우)는 일일이 입사를 희망하는 취준생 민원인과 통화를 해야 했다.


입사 지원자의 문의 전화를 받으면 난 가능한한 친절하게 응대하려고 노력했지만(기업 이미지 때문에) 바쁠 때는 콜센터 상담처럼 낮 시간에는 끊임없는 전화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솔직하게 말하면 바쁘거나 바쁘지 않거나 채용 문의 전화는 받기 싫었다. 그만틈 진절머리가 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필요한 것, 궁금한 것은 가능한한 다 말해주는 기질을 타고난 나는 본의 아니게 친절함의 능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절대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건 자신이 왜 떨어졌냐고 묻는 경우다. 흔친 않지만 왜 떨어졌냐고 조심스레 묻거나, 불쾌하게 따지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한 해 지원자가 대략 3만명쯤 되니 그 중 별별 사람이 있었다.) 불합격의 이유에 대해 말하면 안 된다는 건 나의 생각일뿐 아니라, HR의 절대 원칙이었다. 어떤 경우에도 불합격의 <이유>에 대해서는 말해주면 안 된다는 것은 불문율이었고, 이는 합격의 이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지원자가 아무리 애원하고 협박해도 이유를 말해주면 안 된다. 왜 떨어졌는지 이유를 말한다는 건 홍수에 둑을 터뜨리는 것과 같다. "제가 왜 떨어졌나요?"라고 물어오면, "아... B형 간염 보균자라서 떨어졌습니다.", "학교가 조금...., 나이가 많아서요"같은 말을 절대 해서는 안 된다. 이유를 말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저는 면접을 정말 잘 보았는데, 왜 떨어졌는지 도저히 알 수 없어요."라고 따지면, "잠시만요.. 면접 사정표를 볼게요. 아..... 000면접관이 이런 질문을 하셨는데, 이렇게 대답하셨군요. 그럴 때는 이렇게 대답하시는 게 좋아요. 말씀하실 때는 바닥을 보지 말고, 면접관의 눈을 보고 말씀하셔야죠, 자기중심적이고, 체력이 약해 보였다고 적혀 있네요...."등의 이유를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저는 바닥을 본 적이 없어요. 신께 맹세할 수 있어요. 전 태어나서 줄곤 사람 눈을 보고 얘기했어요. 그럴리가 없어요, 면접실에 CCTV가 있나요?, 무얼 근거로 제가 자기 중심적이라고 판단했죠? 그리고 약간의 자기 중심성이 직무 역량에 얼마나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정말 모르세요? 그 정도도 모르는 한심한 기업이었나요? 제가 체력이 약하다고요?, 어이가 없네요, 그날 면접 본 다른 지원자들과 체력 테스트를 해야겠어요. 응하지 않으면 소송하겠어요." 확율적으로 높아졌을 뿐, 불합격의 이유를 말해서 문제가 될 소지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그래서 예전에 일하던 기업은 불합격의 이유를 절대 말해주지 않았다. 하늘은 푸르다처럼 불합격의 이유를 말하지 않는 것은 채용의 당연한 상식이다. 그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최근에 흥미로운 면접 후기를 몇개 보았다. 기업에 지원해서 떨어진 경험이 있는 지원자가 쓴 글이었다. 불합격으로 절망에 빠졌고, 자신이 왜 떨어졌는지 너무나 알고 싶어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기업에 문의를 했는데, 놀랍게도 컨설팅 해주듯 친절하게 상세하게 불합격의 이유를 설명해 주었단다. 그 불합격의 이유를 가슴에 새기고, 달라지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다른 기업에 합격했다는 이야기였다. 한 대 얻어 맞은 듯 찡한 마음이 밀려왔다.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뀌는 것 같았다. 많은 생각이 떠오르는 이야기였다. 앞으로의 채용은 지원자들이 원하면 그들의 불합격 이유를 말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으로 생각은 끝났다. 불합격의 이유를 말해줌으로써 겪게 될 온갖 <문제 가능성>과 자신의 문제를 절실하게 묻는 취준생을 향한 <휴머니즘> 사이에서 치열한 고민을 한 결과인지, 아무 생각없이 실수로 불합격의 이유를 말해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지원자를 뽑는 입장에서 이루어지는 세세한 과정과 함께 불합격의 이유를 개별 지원자에게 상세하게 말해 줄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들의 채용에 자신있다는 뜻이다. 자신있다는 것은 당사자에게 직접 말해줄 수 있을만큼 불합격의 합리적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채용 공정성이란 그럴듯하고 복잡한 채용 기준을 마케팅하거나, 결코 적나라하게 공개할 수 없는 AI채용 알고리즘에 채용을 맡기는 것으로 해결할 수 없다. 복잡한 그럴듯함으로 채용 절차를 포장하는 것은 채용의 공정성을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채용 공정성을 암막커튼으로 덮어버리는 일이다. 내용을 공개할 수 없는 공정성이란, MDF에 원목 무늬 시트지를 바르고 원목이라 우기는 것과 같다.


당치도 않은 말로 들리겠지만, 더 많은 지원자들이 자신이 떨어진 이유를 알 권리를 요구하면 좋겠다. 기업은 지원자가 원한다면 불합격의 이유를 알려줄 의무가 생기면 좋겠다. 불합격의 이유를 알려주는 일이 힘들지만 가능하다고 말하는 기업은 직무 역량 중심의 공정한 채용을 위해 노력하고 있고, 절대 공개할 수 없다고 버티는 기업은 자신들도 이해할 수 없는 엉터리 채용을 하고 있다는 뜻일 게다. 그렇게 분위기가 바뀌면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채용은 저절로 공정하게 바뀔 것 같다. 정상적인 채용을 한다면 왜 떨어지고 왜 합격했는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기업의 가장 은밀한 부분이기도 한 채용 정보가 공개되는 사회를 꿈 꿔 본다.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공정한 사회를 만드는 태풍이 될지 모른다. 지원자는 모두 궁금해 한다. 자신이 왜 붙었는지, 왜 떨어졌는지 궁금해 한다. 그 궁금함이 지원자의 당연한 권리가 되고, 기업의 당연한 의무가 되는 사회,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사회적 상식이었던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뀌는 것보다 만 배는 쉬운 일 같다. "저 왜 떨어졌나요?"라는 당연한 물음에 대답에 성실하게 줄 수 있는 기업이 많아지면 좋겠다. 그런 기업들이 많아지면 완벽하고 공정한 채용 시스템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만은 알게 될 것 같다. 공정성의 문제는 그럴듯함으로 숨기고 덮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공정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공정함이 시작된다. 불공정성, 불완전성을 용기있게 보여줄 수 있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런 태도가 채용의 진정성이라고 생각한다. 진정성을 지닌 기업이 성장하는 시대다. 취준생은 지원자이기도 하지만, 기업의 소비자이자 투자자라는 사실을 기억하면 좋겠다. 채용은 지하철 앞 자리에 앉은 사람을 마음 속으로 판단하는 일과 다르다. 누가 들어도 인재 선발을 위한 기업의 치열한 고민과 노력, 그리고 그 어려움을 인정하고 부족하지만 나름 최선을 다했다는 걸 보여줄 수 있는 기업, 그런 상호작용을 통해 배우고 성장하는 기업, 그런 기업만이 살아남는 시대. 생각보다 가까이 와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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