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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게티

by 피라


일을 마치고 아이를 차에 태웠다. 저녁에 뭐 먹고 싶냐 물으니 스파게티가 먹고 싶단다. 집에 오니 아침에 해 둔 밥이 있다. 빨리 먹어야 할 밥이다. 오늘은 밥을 먹고, 스파게티는 내일 먹자고 했다. 아이는 극구 스파게티를 먹겠단다. 나는 밥을 먹고 싶었다. 뭐라도 빨리 먹어야 할 허기진 저녁에 아이와 실랑이를 하고 싶지 않았다. 스파게티를 해 준다고 했다.


스파게티 면을 조금만 삶았다. 아이는 스파게티를 실컷 먹었고, 나는 스파게티와 밥, 반반씩 배를 채웠다.


상대가 원하는 것과(가치 있다 여기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이 상충되어서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할 때가 있다. 서로 다른 가치가 부딪힐 때 해결 방법은 3가지다. 가장 쉬운 것은 우격다짐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밀어붙이는 방법이다. 그럴 때 아이는 운다. 그 다음 쉬운 것은 절충안을 생각하는 것이다. 아이는 스파게티를, 나는 밥을 먹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에너지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번거롭다. 가장 쉬운 방법은 대화로 생각을 바꾸는 방법이다. 오늘은 밥을 먹고 내일은 스파게티를 먹자고 살살 달래보는 일이다. 이 방법도 리스크가 따른다. 금방 고개를 끄덕일 수 있지만, 울고불고 난리가 나서 저녁 시간이 엉망진창이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오늘 저녁은 밥이라고 이미 정한 상태에서는 대화의 진전이 없다. 그 미묘한 일방적 느낌을 아이도 안다. 아이와 대화를 하려면 싫지만 내가 스파게티를 먹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화를 가장한 우격다짐이 된다.


밥을 먹고 싶은 나와 스파게티를 먹고 싶은 아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일은 정치 행위와 똑같다. 서로의 가치가 충돌할 때 풀어 나가는 일 말이다. 정치인들이 나와 서로 자신의 주장을 하는 라디오 방송을 가끔 듣는다. 대부분 거북하다. 저녁밥으로 스파게티를 먹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들과 저녁밥으로 밥을 먹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것 같기 때문이다. 스파게티를 한 번도 먹어 본 적 없는 사람은 스파게티를 저녁밥으로 먹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한다. 스파게티를 먹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내가 먹어 봐서 아는데 스파게티는 저녁밥으로 먹을만한 음식이 아니라고 한다.


정치인의 자질은 자신이 모르는 다양한 가치를 배우려는 학습 태도다. 자신의 가치와 상충되는 주장을 들어도 도대체 어떤 이유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지 보고, 듣고, 경험하며 그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이해해야 한다. 상대의 입장에서 그들의 가치를 존중하지 않고, 무조건 "넌 스파게티를 먹으려고 하는 잘못된 생각을 가졌어!, 오늘 저녁은 무조건 밥이야"라는 태도를 고수하면 정치를 할 수 없다. 정치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정치를 하는 것이 한국 정치의 문제라 생각한다. 정치란 세상의 다양한 가치를 이해하고 조정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고, 정치 행위의 시작은 내가 모르는 가치를 깊고 넓게 이해하는 것으로 출발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어렵다. 어렵다고 스파게티를 먹고 싶다고 애처롭게 말하는 아이를 울려서는 안 된다.


정치와 일은 똑같다. 일도 의사소통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다. 일에서 필요한 의사소통 능력은 자신과 생각과 코드가 맞는 사람과의 의사소통이 아니다. 말도 섞기 싫은 사람, 보기만 해도 역겨운 사람, 이야기를 나눌 수록 가슴이 답답해 숨쉬기 힘든 사람,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사람과 의사소통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진상 고객, 악성 민원인, 또라이 상사와 동료, 말도 안 되는 일, 비합리적 업무 진행, 미쳐 돌아가는 것 같은 세상, 직장인 스트레스의 근원은 원치 않는 상황에서, 원치 않는 사람과, 원치 않는 내용을 원치 않는 방식으로 의사소통해야 하는 문제가 대부분이다.


일의 결과물은 의사소통의 결과물이다. 일을 잘하기 위해서는 의사소통 능력을 키우는 연습이 필요하다. 학생 때부터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 싫어하는 사람과 대화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관심 없는 분야, 알고 싶지 않은 가치, 싫어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배우고 성장할 수 있다. 그래야 취업이든 창업이든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다. 싫어하는 것, 관심 없는 것과의 의사소통 연습은 문제해결을 위한 역량의 토대가 된다. 그런데, 자꾸만 좋아요와 싫어요로 양분되는 소용돌이 속으로 깊숙이 빠져드는 것 같아 걱정이다. 문제 해결을 위한 창의적 아이디어란 확증 편향 극복의 다른 말이다. 정치든 일이든 똑같다. 힘들어도 내가 미처 모르는 가치들을 찾기 위해 눈길을 돌리고 시선을 멈추는 일이다. 싫어하는 녀석과 악수하며 친구가 될 수 있는 가능성, 서로 다른 생각을 유지하며 주고받을 수 있는 상태, 넘어지지 않고 그런 균형을 유지하는 방법을 터득하며 재미를 느끼는 것. 나는 그것이 삶이라고 생각한다. 비틀거려도 좋다. 조금씩 나가면 된다. 바라보면 어떻게든 가까워지는 것이 인생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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