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하면 야구를 좀 더 잘할 수 있을까?'와 '왜 국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함부로 대할까?'였다. 박정희, 전두환 시대에 어린 시절을 보냈던 우리 동네, 우리 집 앞에서 국가를 경험했다. 내가 알게 된 국가라는 권력의 첫 실체는 트럭이었다. 그때는 새마을운동 로고 색깔과 같은 노란색 페인트를 칠한 트럭이 거리를 돌아다녔다. 노점을 단속하는 공무원들이었다. 환경 미화라는 이유로 길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단속했다. 단속의 정도가 심해서 일단 눈에 보이면 무조건 노점상의 물건을 트럭에 싣고 가버렸다. 때로는 때려 부수어 트럭에 싣기도 했다. 그 공포의 트럭이 나타나면 자신의 생명줄인 장사 도구와 팔던 물건들을 보자기에 허겁지겁 들고 도망갔다. 그들은 이름과 얼굴만 다를 뿐 내 부모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트럭은 파리채를 잡고 바퀴벌레를 잡는 속도로 움직였다.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나타나 팔던 물건, 물건을 담고 옮기는 그릇과 용기, 장사에 필요한 수레, 자전거와 같은 커다란 물건들까지도 트럭에 모조리 싣고 사라졌다. 625, 월남전에서 이야기애 나오는 초토화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인지 이해되는 장면이었다.
시금치 몇 단을 팔면 쌀을 살 수 있다는 희망으로 아이를 업고 거리에 나온 엄마가 모든 걸 잃고 망연자실한 얼굴로 울기도 했다. 우리집도 그 트럭 때문에 공포에 떨었다. 우리집의 생명줄은 떡볶이였다.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부모는 대학교 앞에서 허름한 분식집을 열었다. 가게의 한 유리창이 길 쪽으로 15센티 정도 튀어나온 구조였는데, 노란 트럭은 지나갈 때마다 그 창틀을 철거한다고 부모를 협박했다. 7살 때 겪었던 국가라는 존재의 공포감과 의문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지금도 그 트럭과, 트럭에서 내려 아버지를 협박하던 공무원의 얼굴과, 허름한 가게의 튀어나온 창틀의 모습이 선명하다. 우리집은 그 곳에서 떡볶이 몇 개를 더 팔아야 자식의 초등학교 육성회비 450원을 낼 수 있었다. 그때 누나와 형들은 학교에 가면 육성회비가 밀렸다고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선생님께 야단을 맞곤 했다. 어릴 때였지만 우리처럼 힘겹게 먹고 사는 사람들보다 아무것도 없는 깨끗한 거리가 왜 더 중요한지 궁금했었다.
1주일 미국 여행을 하는 동안 강도를 당하면 미국은 강도들의 나라라고 생각하듯, 어릴 적 경험했던 국가가 약자를 대하는 방식은 넷플릭스 추천 알고리즘처럼 내 사고 방식의 특정한 패턴을 만든 것 같다. 강자가 약자를 대하는 태도, 권력을 가진 자가 그렇지 않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이런 방식의 사고는 서로 상관없는 일도 권력 폭력의 관점으로 해석해 사회생활에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한 예로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에서의 일이 떠오른다. 나보다 6개월 먼저 입사한 사람이 있었다. 입사하자마자 따로 나를 부르더니 자신이 나의 사수라 했다. 모든 이야기는 자기에게 먼저 이야기해야 하며, 자신을 통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뭔가를 말하면 안 된다 했다. 그는 나를 통제하고 관리하려 했다. 그는 나보다 1살 어렸고, 고려대를 나온 자신이 지방대를 나온 나보다 똑똑하다는 걸 항상 은연중에 강조했다. 6개월 먼저 입사했으니 자신이 나보다 일에 대해 잘 알고, 그러니 일에 관한 모든 것은 자신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논리였다. 힘없고 가난했던 부모를 통해 사람을 학력, 나이, 성별, 경제력, 권력 등의 조건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걸 철칙으로 여기는 난 그가 여러모로 불편했다.
출근 몇 일 뒤 내 명함을 만들 때였다. 나는 명함의 이름 영문 표기 순서를 성+이름으로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사수가 안 된다고 했다. 영문 표기는 이름+성으로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무조건 자신의 의견을 따르지 않는 나의 태도가 불쾌하다며 6개월 먼저 입사한 자신의 의견을 깍듯이 대해야 한다 했다. 군대에 다시 입대한 기분이 들어 화가 났다. 명함의 이름 순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는 걸로 여겨져 끝까지 따졌다. 나는 한국 사람은 성+이름으로 불리니, 외국 사람들도 당연히 성+이름으로 불러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사수와 한 참을 얘기했다. 나의 마지막 결론은 당신은 이름+성이 맞다고 생각하면 당신의 명함은 그렇게 만들고, 나는 성+이름이 맞다고 생각하니 나의 명함은 내 생각대로 표기하겠다고 했다. 명함 때문에 입사하자마자 퇴직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결국 내가 졌다. 내 이름은 하정필이 아니라, 정필하가 되어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문제였지만, 그때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수평적 관계가 아니라, 상명하복의 수직적 관계를 강요하는 그가 어릴 적 우리 집을 부순다 협박했던 노란 트럭 같았다.
첫 직장 입사 동기가 41명이었다. 간혹 만나면 내가 일하는 인사팀을 공무원, 깡패, 검사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욕했다. 돈은 생산 부서에서 벌고, 경영 지원은 돈을 쓰기만 하는 부서인데, 권력은 우리가 다 가지고 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 말이 맞았다. 내가 일하는 부서는 권력을 행사하는 부서였다. 난 입사하자마자 수천 명의 근로자를 관리 통제하고, 채용이란 과정을 통해 타인의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권력을 가졌었다. 골치 아픈 문제의 대상인 근로자와 노동조합을 보면서 내가 있어야 할 곳은 경영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곳이 아니라,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저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노동조합도, 경영자도, 근로자도, 나의 사수도, 같이 일하는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며 일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신이 이익을 위해 해서는 안 되는 일도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일이 시시해졌다.
시시하게 살고 싶지 않아서 퇴직하고 여러 곳을 떠돌았다. 떠돌다 보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은 사수 밑에서 고분거리며 일하는 삶을 동경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퇴직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지만, 하나 아쉽고 후회되는 것이 있다. 사회 초년생이었던 내게 일의 본질을 아는 누군가가 일이 무엇인지 제대로 가르쳐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다. 그런 사람이 없더라도 나 스스로 일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연구하며 배웠어야 했다는 후회다.
수십 년 지난 지금에야 일이 무엇인지 조금 알겠다. 나 자신도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며 20년 동안 학생들에게 직무 역량을 말해왔던 게 부끄럽다. 이제와서야 일에 관심을 가지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이유가 있다. 시간을 되돌려 첫 직장에서 어리둥절한 시간을 보내던 나, 출퇴근을 반복하며 점점 희미해지는 자신을 느끼던 나, 토요일 오후 기숙사 침대에 누워 천장의 회색 벽지를 바라보며 '나는 여기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생각에 눈물 흘리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날의 20대 청년에게 해주는 말이 50대가 되어버린 지금의 나에게도 의미 있을 거란 생각도 든다. 어쩌면 다른 누군가에게 쌀 한 톨 정도의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