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 동물과 함께 사는 사람들이 천만명이 넘는단다. 개나 고양이는 인간의 언어가 없기 때문에 직접적 의사소통을 못한다. 그래서 행동과 상태를 관찰하며 무엇을 원하는지,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귀찮아하는지, 아픈지 등을 관찰한다. 반려 동물은 행동과 모습으로 인간에게 드러난 정보와 드러나지 않은 두 가지 정보를 제공한다.
드러난 정보는 텍스트, 드러나지 않은 정보는 서브텍스트다. 텍스트를 굳이 글에 한 한정할 필요는 없다. 독서를 하며 행간의 의미를 읽듯 사람을 대화할 때, 쇼핑 아이템을 고를 때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서브텍스트를 읽는다. 그래야 사기 당하지 않고 현명한 소비를 할 수 있다. 고양이가 모퉁이에 몸을 비비는 것은 텍스트, 그 의미는 서브텍스트다.
면접관이 주로 하는 것이 서브텍스트를 읽는 일이다. 텍스트 형태로 정리된 지원자 서류를 보며 진짜 어떤 지원자인지 생각하는 것, 지원자와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고 발표를 시켜보며 진짜 어떤 지원자인지 판단하는 일이다.
세상의 정보는 두 가지가 있다. 드러난 정보와 드러나지 않은 정보다. 아무리 완벽한 언어 능력을 가진 사람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100% 설명하고 표현할 수 없다. 생각은 다비드 조각상처럼 변하지 않는 물체가 아니다. 생각과 감정은 끊임없이 변한다. 특정 순간을 아무리 잘 포착해서 언어, 이미지, 문자의 형태로 표현해 낸다 해도 그건 변화의 한 순간에 대한 정보일뿐이다.
세상은 출렁이는 파도와 같고, 개별 존재는 생각과 감정이 끝없이 움직이는 작은 물방울이다. 인간은 겉으로 드러난 정보, 즉 텍스트를 통해 끝없이 서브텍스트를 이해하려 노력한다. 저 사람의 진심은 무얼까? 저 행동의 의미는 무얼까? 이렇게 공부하면 될까? 이게 일을 계속 해야 하나? 이 문자는 보이스 피싱일까? 지혜란 감춰진 서브텍스트의 진실에 가 닿는 일이다.
육아를 텍스트만으로 하면 말을 듣지 않는다. 옷 입어라, 양치해라, 골고루 먹어라, 동영상 그만 봐라. 아이뿐 아니다. 어른도 마찬가지다.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할 방법을 이야기하다보면 100이면 100, 다 안다고 한다. 알고 있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다. 드러난 정보, 텍스트의 한계다. 교육도 그렇다. 서브텍스트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텍스트만으로 이루어지는 교육의 대명사는 교장 선생님 훈시다. 아이들은 괴로워한다.
서브텍스트는 스스로 해석하고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 스스로 재미를 제공한다. 서브텍스트가 만들어지는 주체는 읽는 이, 정보를 수용하는 이다. 서브텍스트 생성 비결은 아이에게 놀 공간과 놀꺼리를 제공하고 나머지는 알아서 해라라는 것과 비슷하다. 조건이 주어지면 아이들은 신나게 논다. 어떤 상황에서도 신나게 놀고야 만다. 육아라는 이름으로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자기계발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은 끝없이 교장 선생님의 훈시를 듣고 있다. 그래서 아이고 어른이고 삶이 피곤하다. 그 좋아하는 생산성도 낮다.
한 줄의 글, 짧은 대화, 순간의 경험으로 인해 삶이 바뀌기도 한다. 대상과 내가 온전히 상호작용하면 가능한 일이다. 심오한 서브텍스트와 만나는 일이다. 사소한 휘발성 서브텍스트와 만나는 일은 재미고, 크고 중요한 서브텍스트와 만나는 일은 통찰이다. 다시 말하지만 서브텍스트는 글에 한정된 의미가 아니다. 이 봄날에 한 떨기 꽃을 보고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는 것도 서브텍스트와의 깊은 만남이다. ‘봄이니까 노란 개나리가 폈네, 당연한 일이지.’라는 이해는 텍스트적 이해다. 평생 건성으로 바라보던 꽃에 돌아가신 엄마의 삶이 중첩되어 꼼짝않고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느끼는 것, 그것이 서브텍스트를 읽는 일이다.
드라마와 소설이 재미 있는 것은 서브텍스트 때문이다. 재미 있는 스토리는 다 말하지 않는다. 감출 것과 드러낼 것을 적절히 정한다. 목적은 읽는 이의 공간을 위해서다. 독서든, 공부든, 일이든, 삶이든 그것을 하는 이가 스스로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없다면 재미도 의미도 없다.
삶이 공허하다면 드러난 것, 텍스트에만 집착하고 그것이 전부라 여긴 탓은 아닌지 돌아봐야겠다. 삶의 본질은 드러난 것, 드러나서 자부심을 가지며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지 않은 것, 결코 드러낼 수 없는 것에 놓여 있을 지 모른다.
아이에게 동영상 그만 봐라고 말하지 말고, 책 읽는 즐거움을 알려주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 현재로선 선택은 내가 책 읽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뿐이다. 문득 궁금하다. 초졸인 돌아가신 엄마가 평생 책 읽는 모습을 보여준 건 나 때문인가? 자신 때문이었는가? 아니면 나와 당신 사이의 무엇 때문이었을까? 오늘 아침의 서브텍스트다.
뭐든 보기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