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은 인간의 오래된 필기도구 중 하나다. 잉크라는 밥을 계속해서 먹여야 하는 것은 생물과 비슷하다. 글쓰기는 입력과 출력의 문제라는 점에서 만년필은 글쓰기에 적합한 도구같다.
중요하다 여기는 글, 마음을 담아 정성껏 글을 쓰고 싶을 때 종이 노트를 꺼낸다. 시간이 흐를수록 글씨가 자리를 잡아간다. 조금씩 단정해지고, 글자크기도 작아진다.
IT시대의 디스플레이처럼 만년필은 종이가 중요하다. 어떤 종이는 잉크가 번지거나 뒷장에 비친다. 심하면 찢어지기도 한다. 만년필 노트용으로 좋다는 미도리노트를 쓴다. 24장짜리 얇은 노트고, 종이가 부드럽고 얇은데도 불구하고 필기감도 좋고, 번짐도 비침도 없다.
손글씨는 그때그때 몸과 마음 상태에 따라 글씨가 달라진다. 한 문장의 글도 춘하추동, 희노애락처럼 시작, 중간, 끝이 각각 다르다. 빨라지고 느려지고, 옆길로 빠졌다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다. 글과 나의 상호작용이라는 측면에서 손글씨는 키보드 타이핑과 많이 다르다.
컨베이어벨트에서 생산되는 듯한 모니터의 글자는 말이 없지만, 신경, 힘줄, 근육의 압력으로 빚어낸 글자는 내게 말을 걸어온다. “이것봐 너무 급했다고, 마음을 담아 좀 더 천천히 정성껏 쓰라구….”
만년필로 글을 쓰기 시작한 지 1년이 지났다. 90장을 썼다. 지구에게는 미안하지만 앞으로 더 자주, 더 많이 쓰고 싶다. 낯선 곳으로 홀로 훌쩍 떠나 아기자기한 오래된 골목길을 유유자적하는 여행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