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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타인터뷰 Aug 31. 2023

교권

훈육을 하면서 교육을 한다고 착각하고,

교육을 하면서 훈육을 하면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훈육과 교육의 차이는 전제다. 

내가 맞고 아이가 잘못되었다는 전제가 있으면 훈육이다. 

훈육은 잘못된 아이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이 맞는지 틀린지, 아이의 행동이 맞는지 틀린지 확신이 없다면 훈육을 할 수 없다.

그때는 교육을 해야 한다.


나도 틀릴 수 있고, 아이도 옳을 수 있다는 전제가 있으면 교육이다.

교육은 상호작용을 통해서 서로가 배우는 과정이다.

일방적 정보 전달도 상호작용이다.

주입식 교육은 한 주체가 다른 주체에게 정보를 제공하는(생각에 영향을 미치려고 노력하는) 일회성, 일방적 상호작용이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쌍방성 상호작용이 반복되지 않으면 교육을 받는 사람도, 교육을 하는 사람도 지친다.

좋은 교육이란 교육을 하는 사람 스스로 배우는 교육이다.

스스로 배우는 아이란 스스로 배우는 교사의 모습을 통해서 실현가능한 개념이다.

학교는 훈육이 아니라 교육을 하는 곳이어야 한다. 훈육은 주로 가정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교육자도 배우려면 쌍방의 상호작용을 해야 한다.

한국의 교육은 불행하게도 일방성, 일회성 상호작용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학교에서 엎드려 자고, 

교사들은 무력감을 느낀다.

그런 환경 속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로 자란 성인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내가 이토록 열심히 노력해서 공부를 잘하고 대학을 갔는데,

이런 대접밖에 받지 못하다니!'

가 청년 세대들 분노의 실체다.


교육의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아이의 머리 속에 정보를 구겨 넣어 AI와 피나는 경쟁을 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면 지금의 교육 방식이 외에는 대안이 없을 것 같다.

정보를 머리 속에 많이 담고 있으면, 좋은 직업을 얻고 저절로 좋은 삶이 펼쳐진다는 생각은 망상이다.

과거 취업이 잘 되던 시대는 그들이 똑똑해서가 아니라,

사회 여러 영역의 산업이 성장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산업의 구조가 바뀌고, 직업이 바뀌고, 필요한 인재상이 바뀌고 있다.

정보를 머리에 넣었다가 그대로 출력하는 방식의 일은 인공지능이 대체한다.

세상에 수많은 정보들 중에 의미 있는 것을 독창적 방식으로 재구성해 재정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필요한 시대다. 창의성, 기획력, 문제 정의 능력 등과 연결되는 공감과 연민의 능력도 뛰어나야 한다.

우리 교육  어느 자락에서 그런 교육을 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한다.

아무리 융합적, 창의적 교육도 구구단을 외우는 방식으로 한다면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나 인공지능에 뒤지는 사람을 양산하는 교육일뿐이다. 

시험에 나오는 정보를 머리 속에 주워 담아 테스트하는 방식은 종말을 고해야 한다.

그런 방식의 교육은 아동학대이며 인권에 위배된다.

천박한 자본주의 방식으로 말하면 인권은 경제력에서 나오는데, 

한국의 교육은 직업적으로 최소한의 경제력도 못 가지게 만드는 반인권적 교육이다.


무너진 교권을 회복하는 일은 교육다운 교육을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서울대 졸업해서도 초조한 마음으로 입사 지원을 수십 곳을 해야 하는 현재의 상황에서,

졸업 후 무용한 잘못된 교육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하며 교권을 강화한다는 것은,

폭우가 쏟아지는 우기에 허허벌판에 서서 마른 속옷을 요구하는 것과 같다.

무의미하다는 뜻이다.


하나 뼈아픈 것은,

학교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교육공무직들의 처우 개선에 교사집단이 극렬하게 반대했다는 부끄러운 과거다.

그들의 처우가 나아진다고 해서 교사들의 처우가 나빠지는 것도 아닌데,

'학창 시절에 우리보다 공부도 못한, 우리보다 열등한 종족인 너희들이 감히'라는 마음을 가진 교사들이 다수였다. 교육의 목적은 더 나은 개인과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더 나은 사회란 더 나은 직업적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이다. 교사들이 그들과 함께 일하는 동료 직업인들의 처우 개선에 반대했다는 것은

교사들 스스로 반교육적 생각과 행위를 했다는 방증이다. 

그런 생각으로 다수 교사들은 입시 위주 교육의 공범자가 된다.

공부를 잘하는 것, 그래서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 일생일대의 교육적 목표가 된다.

교사들만의 문제는 물론 아니다. 학부모가 그렇게 생각하고, 학생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다.

이제는 좀 바뀌었으면 좋겠다.


학생들이 학교를 가고 싶어하고,

수업이 재미있고,

수업을 통해서 매일매일 배우고 성장하는 경험을 선사하는 교육이 되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실에서 의사소통, 문제해결을 통한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교육으로 바뀌어야 한다.

공교육이 그런 역할을 한다면,

졸업 후에 대학따위 가지 않아도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느끼며 자신만의 직업으로 경제활동을 하는 청년들이 많아질 거다.

중고등학교가 바뀌지 전에,

대학이 먼저 바뀌지 싶다.

대학의 생존이 달린 문제이니.


공교육이 대학을 뒤쫓아 가지 않길 바란다.

공교육이 대학을 주도하길 바란다.

하지만,

그렇게 될 확율은 매우 낮을 것 같다.

교사, 학교 관리자, 교육청, 장학사, 장학관, 교육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런 교육 본질에 대한 문제의식과

해결 방안보다는 시키는 일, 해야 할 일들에 집중하며 그 조직에서 인정받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교육다운 교육을 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시키는 일을 잘해서 높은 서열의 힘있는 자들의 쓰다듬을 받고 싶은 인정과 권력의 욕구를 극복하지 않은 한 교육은 천천히, 가장 마지막에 무장해제되듯 바뀔 것이다. 그때는 너무 늦을 것이다. 


학생들에게 도움되는 교육 개혁은

교육에 관여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밥그릇보다 자신들 일의 본질로 돌아감으로 가능한데,

지난 과거를 보면 그들 스스로 변할 확률은 희박해 보인다.


변화는,

대학이 주도하든지,

학부모들이 주도하든지 해야 할 것 같다.

이 역시 별 가능성이 없을 것 같다.


하나 남은 대안은,

세상이 더 변해서 공교육도, 대학도 아무런 쓸모가 없어졌다는 것을 절반 이상의 사람들의 절절히 느꼈을 때

이미 망한 놀이 공원이 공식적으로 폐업하듯이 실패를 인정하고 공식 폐업하듯,

마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또 흉내내듯 교육제도를 바꾸는 방식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답답하고 우울해진다.

몇 명 보지 않은 이 공간에 이런 글이나 올리고 있자니 서글프다.

함께 방법을 찾고 싶다.

취학 전부터 고3의 아이가 있다면, 청년 실업의 문제를 겪는 가족이 있다면,

일자리의 문제를 겪고 있다면, 그런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모여 문제를 해결했으면 좋겠다.

고용의 문제는 당장 해결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교육의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

학생들이 즐겁게 배우고, 졸업 후 자신만의 직업을 가질 힘을 길러주는 교육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토론하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으며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는 재미, 그 자리를 지혜로 채우는 경험을 하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

매일매일 배우고 성장하는 재미로 학교를 오게 만드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성역없이 민감한 정치적 이슈도 토론하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

입시를 가르치는 학교가 아니라,

삶을 가르치는 학교, 세상을 가르치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


졸업하면 무용한 정보가 아니라,

졸업 후는 물론 매일 매일 유용한 지혜와 삶의 태도를 가르치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

독창적 문제를 제기하고 함께 해결해 나가는 경험을 쌓아주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

교육다운 교육을 하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교사가 자부심을 되찾고, 그토록 바라는 교권을 회복하게 된다.

교권은 오직 교육을 통해서 회복될 수 있다. 

교권은 교육다운 교육의 다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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