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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동생

by 메타인터뷰 Feb 13. 2025

토목과를 졸업한 삼촌은 동아건설에 입사했다. 얼마 후 사우디아라비아로 발령받아 한국을 떠났다. 그때는 신혼이었다. 숙모는 시부모 가족과 함께 살았다. 갓 태어난 아들이 있던 숙모는 집안의 실질적 가장이었다. 몇 년 후, 삼촌은 사우디 생활을 접고 한국에 돌아왔다. 그때 삼촌 집에 간 기억이 뚜렷하다. 장난감들 때문이다. 삼촌 집에는 사촌동생의 장난감이 한 가득이었다. 사우디에서 번 돈으로 그립던 아들에게 장난감이라도 많이 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때 사촌동생 나이가 4살쯤 되었던 것 같다. 장난감다운 장난감을 가져보지 못한 나는 사촌동생이 부러웠다. 부러움은 미움으로 바뀌었다. 한겨울 장갑 끼지 않은 손처럼 마음이 금방 차가워졌다. 장난감을 부러워하는 마음은 어린 사촌동생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가지지 못한 자의 가진 자를 향한 성숙하지 못한 감정이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형형색색의 듣도보도 못한 장난감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10살의 나와 만난다.


세월이 흘렀다. 장난감을 많이 가졌던 사촌동생은 대학생이 되었다. 나는 늦깎이 대학 졸업반이었다. 신입생 시절, 사촌동생은 내게 자주 연락했다. 내 친구들과의 술자리도 함께 했다. 188센티미터의 기골이 장대한 몸에 어울리지 않게 그는 착했다. 너무나 순하고 착했다. 몸은 다 컸지만 마음은 어릴적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4살 아이처럼 순하고 착했다. 사촌동생은 나를 좋아하고 따랐다. 하지만 여러 일로 바빴던 나는 그를 자주 오래 만나지 못했다. 그 시절 몇 달 동안 몇 번 본 것이 그를 바깥에서 만난 전부였다. 그 뒤로 몇 년에 한 번, 어쩌다 가족끼리 만날 때 “잘 지내나?”라고 물어보는 것이 전부였다.


지난 주에 그 사촌동생이 누워 있는 관을 들었다. 6명이 3명씩 양쪽에 붙어 무명천으로 매듭 지어 만든 흰 줄을 꽉 쥐었다. 우리는 사촌동생의 관을 들고 화장장 화로로 걸어갔다. 몸이 큰 탓인지 수골까지 2시간이 걸렸다. 그의 몸이 불타고 있을 때 동화처럼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다. 부산에 함박눈이라니. 그것도 낮에. 얼마 후 눈은 거짓말처럼 그쳤다. 얼마전까지 살아있던 그가 거짓말처럼 죽었듯. 아들의 죽음을 감당하기 힘들었던 숙모는 화장장에서 반실성 상태로 아들을 계속 찾았다. 넋이 나간 삼촌은 빨리 정리하고 곧 따라간다는 말만 되뇌었다. 잘못한 것 하나도 없다고 말씀드려도 삼촌과 숙모는 계속 미안하다는 주문같은 혼잣말을 하셨다.


병명은 위암이었다. 병원을 찾은지 3개월만에 하늘나라로 갔다. 멀쩡했는데, 입맛이 없고 살이 좀 빠져서 병원에 가봤는데 위암 말기였다. 수술을 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병원 휠체어에 앉아 굼뜬 얼굴로 인사를 주고받을 때 이미 죽음을 예상했다. 하지만 그렇게 착한 사촌동생이 막상 하늘나라로 떠나니 마음이 무척 아팠다. 부모가 떠났을 때보다 더 아팠다. 갈 때가 된 사람과 갈 때가 되지 않은 사람의 차이 때문이다. 운명은 남은 시간을 고려하지 않는다. 죽음은 편견이 없다. 그 무엇도 해석하지 않는다. 단지 현상만 있을 뿐이다.


한 뼘 둘레 황회색 항아리에 사촌동생이 들어간 지 6일이 지났다. 격동하던 감정과 몸은 제 자리를 찾고 있다. 잊지 않을 것이다. 착하디 착하게 살다 간 한 사람을 잊지 않을 것이다. 장난감을 많이 가진 그를 미워했던 부끄러운 마음도 잊지 않을 것이다. 장난감다운 장난감을 가지지 못했던 ‘가난한 나’라는 어릴적 생각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무엇을 가졌는지에 따라 무언가를 판단하는 어리석고 부끄러운 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많이 늦었지만 그때 미안했다. 잘 가라. 잘 지내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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