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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법

by 피라

태어나 처음으로 책에 빠져든 건 초등학교 3학년 겨울 방학이었다. 한글을 자유자재로 읽게 된 뒤, 긴 글을 읽는 재미를 우연히 만났으리라. 방학 내내 먹고 자는 시간 외에는 항상 책을 읽는 상태를 유지했다. 정확히 말하면 독서에 빠진 것이 아니라 이야기에 빠졌다. 세월이 흐르고 어른이 된 뒤의 독서는 이야기보다 개념 중심이었다. 운동을 해야 하는 나이가 되지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삼류 이야기만 아니라면 이야기에 빠져들기는 쉽다. 이때 간과하는 것이 있다. 개념에 빠져드는 건 이야기에 빠져들기보다 더 쉽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개념에 빠져들어 헤어나오지 못한다. 신념, 생각,가치 등으로 불리는 개념이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니? 네가 잘못했네, 그러면 안 되지, 한심한 놈, 난 틀렸어,….” 등으로 연결되는 개념이다. 이야기에 빠져들면 자신이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개념에 빠져들면 자신이 개념에 빠져들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자신의 생각이 객관적인줄 아는 것이다.


개념에 빠져든 사람은 책 읽는 방법도 다르다. 자신의 기준으로 책을 읽는다. 나의 생각, 경험, 가치를 기준으로 놓고 책의 내용을 해석하고 판단한다. 자기중심의 생각, 이해, 판단에 대해 질문하고 의심하지 않는다. 자기개념에 빠진 사람들의 특징은 자아비대증이다. 자아비대증 증상의 특징은 여간해서는 자신의 입장과 생각에서 물러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 태도와 내용을 ‘정체성’이라는 이상야릇한 단어와 동일시한다.


개념에 자아가 먹혀버린 사람은 개념이 자아라고 착각한다. 여기에 감정까지 더해지면 자아비대증은 걷잡을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의 독서는 ‘발견’이 없다. 오직 ‘확인’만이 있을뿐이다. 이미 그렇게 믿는 것, 이미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이미 그렇게 생각하는 것, 특정 목적에 맞는 내용에만 관심을 두고 그렇지 않은 내용에는 관심이 가지 않는다. 편향이 강화되는 독서다. 자아가 강해지는 독서다. 그럴듯한 개념에 점점 매몰되는 독서다.


독서의 목적은 정신의 자유다. 독서는 두 종류가 있다. 익숙한 개념으로 자신의 몸과 정신을 점점 강하게 결박하는 독서와, 자신을 지배하는 개념으로 벗어나거나 새로운 개념과 만나는 독서다. 전자는 확인의 독서고, 후자는 발견의 독서다. 어떤 독서를 해야 할지는 굳이 말할 필요 없다.


책을 읽을 때는 자아를 버려야 한다. 자아라고 설명되는 나의 생각, 감정, 경험, 가치, 목표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나를 지배하는 개념에서 벗어난 초월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저자의 생각을 온전히 따라갈 수 있다. 온전히 따라간다는 것은 텍스트로 표현되지 않은 맥락, 문장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의도, 생각, 인생을 읽는 걸 의미한다. 저자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것이 독서의 목적이 아니다. 저자가 다 말하지 못한 것, 저자 자신도 모르는 것, 저자 삶의 본질과 진실을 읽어내는 것이 온전한 독서다. 이야기는 은유와 상징으로 저자의 삶이 텍스트에 구현되지만, 개념은 저자의 삶이 축소, 왜곡, 과장의 과정을 통해 파편화된 결과물이다. 진실적 실체라는 전체 덩어리에서 파편화되어 떨어져 나온 부유하는 먼지같은 개념을 전부, 완전, 무결, 편들기로 대하면 삶과 세상이 위험해진다. 개념의 위험성은 저자에게나 독자에게나 똑같다. 책을 통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개념에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개념에서 빠져나오는 일이다. 개념에서 빠져오려면 개념을 익혀야 한다. 다양한 개념을. 그게 공부다.


책을 통해 배운다는 말은 내가 알고 있는 개념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개념으로부터 빠져나온다는 뜻이다. 역설적이게도 새로운 개념, 낯선 개념과 진정으로 만나야 기존 개념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다. 개념으로부터 빠져나온다는 말은 기존 개념을 부정하고 버린다는 뜻이 아니다. 거리를 둔다는 뜻이다. 목수로 비유하지만 오직 망치만 이용해서 나무를 다루려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신의 일을 즐기는 목수의 첫번째 일은 무엇을 만들지 정하지 않는 것이다. 손에 들고 있는 도구를 놓고,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면 무엇을 만들 건지 자신도 모르게 떠오르는 법이다. 평생 똑같은 책상만 만들어야 한다 생각하면 그것처럼 지겹고 힘든 일도 없을 것이다. 독서는 똑같은 생각의 대량생산이 아니라, 다른 생각으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만드는 하나밖에 없는 핸드메이드 목공예품에 가깝다. 확인의 독서가 아니라 발견의 독서를 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초월하든지, 나를 잊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거리두기다. 나 자신과 거리 두기. 자신과 거리를 두고 책을 읽을 때가 가장 몰입하기 좋은 상태다. 나의 입장에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입장에서 책을 읽는 것, 쉬워보이지만 매우 어렵다. 저자의 입장에서 읽는다는 것은 저자를 지지하고 두둔한다는 뜻이 아니다. 먼저 이해를 하고 그 다음에 비판한다는 뜻이다.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고 판단부터, 비판부터 하는 태도는 뭐든 빨리 해치우려는 생산성에 매몰된 생각이다. 그래 속도다. 빛의 속도로 세상이 돌아가는 시대에 인간은 존재론적 결정을 해야 한다. 그 속도를 따라갈 것인지, 그 속도로부터 벗어날 것인지. 속도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인공지능과 경쟁하는 삶게 될 것이다. 지는 삶이다. 살기도 전에 결론이 정해진 삶은 숨막히는 삶이다. 역설적이게도 생각의 속도를 늦추는 것이 인간다운 삶, 기회가 있는 삶을 열어가는 방법이 되리라. 빠른 속도로 사는 삶에서는 오직 확인만이 있다. 속도에 역행하는 사람만이 발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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