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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수와 자유의 딜레마

by 피라



내가 만난 사람들 대부분은 죄수였다. 죄를 지었다는 말이 아니라 갇혀 있다는 뜻이다. 직접 만난 사람도 죄수였고, 책이나 이야기로 만난 사람도 죄수였다. 그들을 가두는 건 신념, 조건, 관습, 그리고 욕망이었다. 감정과 생각은 당위와 눈치를 만나면 더 이상 뻗어가지 못하고 굳어버린다. 타자가 나를 지배한다. 외적 상황과 내적 욕망이 뒤섞여 감옥의 벽을 만드는 콘크리트를 생산했다.


감옥은 벽만 있었다. 하늘은 뻥 뚫렸다. 감옥 속 인간이 세상을 보는 방법은 작은 쪽창과 하늘이다. 고개의 통증을 느낀 인간은 쪽창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감옥을 스스로 만든 인간은 그 속에 갇혀 자랑스러워했다. 감옥은 안전, 보금자리, 자존심, 자기보호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철옹성을 지어 스스로 유폐시킨 목적은 자기증명이었다. 자신은 뭔가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마음. 자기증명의 욕망이 강한 인간일수록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이다. 감옥을 안락한 보금자리로 여긴다. 인간이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두려움이다. 인정받지 못할거라는 두려움.


두려움을 느끼고 드러내는 방식은 다양했다. 슬픔, 분노, 무기력, 착취. 두려움은 과거나 현재의 일이 아니다. 미래의 일이다. 미래를 생각하며 철저하게 준비하는 인간들이 늘어났다. 두려움 때문이다. 그렇게 두려움을 표현하는 과정은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육아, 교육, 자기개발, 재테크, 노후준비, 경제적 독립. 두려움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일은 자기증명의 방법이었다.


두려움은 앎과 무지의 사이에서 생긴다. 조금 알거나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온전히 아는 경우, 아예 모르는 경우는 두려움이 생기지 않는다.

지금은 흔적만 남은 부산 을숙도는 철새들의 천국이었다. 아시아 최대의 철새도래지라는 이름에 걸맞는 곳이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경외감이 느껴지는 풍경이 펼쳐졌다 한다. 그때 철새를 찍으러 을숙도를 찾은 최민식 작가는 말했다. 가까이 다가가도 새들이 날아가지 않았다고. 새들이 인간을 본 것은 수천년, 수만년, 수십만년, 수백만년이 되었을 터인데, 인간이 그리 위험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70여년 전만 해도 철새는 인간을 그리 두려워하지 않았다. 전쟁 전후로 인간들이 변했을까? 지금의 새들은 인간의 인기척만 들려도 도망간다. 물론 남은 새들도 별로 없다. 간혹 다친 새들을 치료하기 위해 포획하면 공포에 휩싸여 필사적으로 탈출하려 한다. 인간은 위험하다는 앎이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인간을 알지 못하는 무지의 창문이다. 도도새는 인간을 몰라서 멸종했다. 두려움은 생존에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삶을 방해하기도 한다. 다친 새뿐 아니다. 인간도 그렇다. 두려움이 외부로 향하면 탈옥수가 될 수 있지만, 두려움이 내부로 향하면 무기수가 된다.

두려움의 본질은 무지다. 아플거라는 생각, 힘들거라는 생각, 조롱받을거라는 생각, 실패할거라는 생각, 먼지같은 존재가 될 거라는 예감,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할거라는 생각, 아무 의미도 없을거라는 생각. 모두 미래에 관한 생각이며, 모두 무지에서 비롯된다. 앎에 의한 무지다. 온전한 앎이 아니라 어설픈 앎이 만든 무지다.

어두운 밤길을 걸을 때 공포감이 엄습하는 것은 저 모퉁이에서 서성이는 그림자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보긴 보았는데 그것이 모를 때 그때 우리는 두려움을 느낀다. 알긴 아는데 제대로 모를 때 그때 우리는 두려움을 느낀다.


두려움을 없애는 방법은 대상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다. 오랜 시간 천착했다고 잘 아는 것은 아니다. 평생 함께 살아도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고, 스치듯 눈빛만 봐도 어떤 사람이지 잘 알기도 한다. 앎은 모순적이다. 안다고 생각하면 무지에 빠지고, 모른다고 생각하면 앎의 세계로 나아간다. 겸손과 자기인정으로 끝없이 배우는 습관은 감옥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자신이 죄수라는 것을 아는 것.

자신이 죄수라는 사실을 모르는 인간은 영원히 감옥에 갇혀 있다.

조그만한 쪽창 너머 손바닥 크기 풍경을 세상의 전부라 믿는다.

자유롭다 생각할수록

자유롭게 살아갈거라 다짐할수록

그는 더 작은 감옥에 갇혀 있다.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죄수라는 걸 아는 자,

죄수만이

자유인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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