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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by 피라

아이를 키운다는 말은 잘못되었다. 어떤 인간도 다른 인간을 키울 수 없다. 아이는 스스로 자란다. 어른도 스스로 성장한다. 어른들은, 부모들은 아이를 자신이 키운다고 착각한다. 이는 마치 푸른 하늘에 둥둥 떠서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자신의 의지가 구름을 움직인다고 착각하는 것 같다. 하늘의 구름은 나의 시선, 나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구름을 움직이는 것은 바람이다. 아이가 자라는 것도 바람 때문이다. 육아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어른이 할 일은 바람을 일으키는 것이다. 아이의 몸과 마음을 움직일 바람, 지혜로운 행동과 영민한 사유로 방향을 틀 바람을 일으키는 것이다. 아이는 구름이다. 어른의 영향력은 바람이다. 태풍같은 바람이 아니라 맑은 하늘 선선하게 부는 바람이다. 조급한 마음은 태풍이다. 아이를 이쪽에서 저쪽으로 당장 옮기고 싶은 마음이 태풍이다. 이런 생각에서 저런 생각을 하는 아이, 이런 행동에서 저런 행동을 하는 아이로 당장 만들고 싶으면 태풍이 몰아친다. 태풍에 휘말린 아이는 부딪히고 넘어지고 깨지고 부러진다. 태풍을 두려워하게 된다. 두려움은 두 가지 행동으로 표출된다. 수동적으로 따르거나 저항한다. 둘 다 좋지 않다. 전자는 스스로 생각하고 기획하고 행동하고 책임지고 개선해나가는 재미와 점점 멀어지는 삶을 살게 된다. 후자는 나쁜 주체성을 강화시킨다. 저항과 비판, 공격과 회피로 만들어진 주체성을 가진 아이는 선호가 명확한 아이, 상처받기 쉬운 아이, 관계를 부담스러워하는 아이로 자라기 쉽다.


부모의 말, 행동, 규칙이 아이에게 바람을 일으키는 경우는 드물다. 익숙해진 탓이다. 또 그 소리야. 맨날 하는 소리라는 익숙함이다. 훈육의 내성을 키워온 탓이다. 누군가가 나를 움직이려 한다는 사실, 나를 변화시키려 한다는 사실을 앞세우면 실패하기 마련이다. 현상태를 유지하려는 것은 생명의 본질이다. 아이뿐 아니다. 성숙한 어른도 마찬가지다. 어른은 현상태를 유지하려는 욕망, 더 편안해지려고 하는 욕망에 저항할 힘이 있다. 만약 그런 힘이 부족하다면 어른이라 할 수 없다.


진짜 문제는 이기심이다. 나를 위한다는 마음이다. 자신을 위하는 것은 생명의 또다른 본질이다. 문제는 자신을 위한다고 믿는 것이 정말 자신을 위한 것인가다. 큰 돈을 주면 두 배로 돈을 되돌려 주겠다는 말에 혹하는 것은 자신을 위한 마음 때문이다. 나의 이익을 바라기 때문이다. 멋진 부동산이 있다는 속삭임에 넘어가 재산을 털어 넣는 것도 자신을 위한 행동이라 믿기 때문이다. 밤마다 치맥을 먹는 것도 자신을 위한 일이라 믿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행동이 한 편으로는 자신을 위한 것이고, 한 편으로는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 갈등 속에서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한다. 아이든 어른이든 다르지 않다.

인간은 바람같은 존재다. SNS 피드에 무한하게 올라오는 새로운 정보들은 우리 삶에 살랑살랑 부는 바람이다. 어떤 바람도 강압적이지 않다. 부드럽고 싱그러운 봄바람처럼 살랑살랑 불어온다. 그 봄바람을 맞고 있으면 우리도 모르게 어디론가 이동한다. 인간은 구름과 같은 존재다. 스마트폰은 우리를 움직이는 바람이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스마트폰이다. 스마트폰 속에서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이다. 바람의 이름은 SNS, 게임과 같은 우리의 시선을 머물게 하는 정보들이다.


부모도 아이들에게 정보를 제공한다. 부모가 입에서 나오는 정보들에 아이들은 저항한다. 자신을 바꾸려는 의도가 정보 자체가 가지는 힘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부모의 말을 백색 소음으로 여긴다. 자신의 말이 아이에게 가닿게 만들기 위해서 부모는 말은 점점 강도가 높아진다. 결국 가장 좋은 방법은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통제하는 방법이다. 게임을 못하게 한다든지, 용돈을 주지 않는다든지, 아이의 가장 소중한 것을 박탈함으로서 자신의 말이 아이에게 가닿게 만드는 전략이다. 고래사냥을 할때, 새끼 고래를 잡아서 부모고래를 유인해 포획하는 방법처럼 비열한 방법이다. 하지만 부모는 비열해질 수밖에 없다. 그것 말고는 통하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보상이나 박탈의 방법을 통해 아이를 변화시키는 바람을 일으키려는 전략은 효과적이다. 하지만 보상의 즐거움이나, 박탈의 두려움이 행위의 이유가 되는 건 두 가지 문제가 생긴다. 아이의 주체성이 옅어지고, 행위의 즐거움과 의미를 깨닫을 가능성을 줄어든다. 대부분 부모가 주목하는 아이의 학습능력이나 공부 습관은 서커스 무대 위 곰의 행동과 같다. 우리는 아이를 서커스 곰으로 키우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보상과 박탈이라는 특정 조건에서만 반응하는 생각과 행동이라는 점에서 아이와 서커스 동물은 똑같다.


대안이 없다. 어떻게 아이를 키워야 할지. 질문을 바꿔야 한다. 아이는 부모가 키우는 것이 아니다. 아이는 어른이 키우는 것이 아니다. 아이는 스스로 자란다. 그러니 스스로 자랄 최소한의 조건만 제공하고 나머지는 아이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하고 성장하게 만들어야 한다. 아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통제할 기회, 실수하고 실패하고 스스로 피드백하며 개선할 기회를 많이 줄수록 아이는 성장한다. 아이를 자라게 하는 것은 부모의 말이 아니라, 부모의 침묵과 인내심, 기다림이다. 모두 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성급하다. 그래서 오늘도 잔소리를 한다. 소리가 커진다. 아이를 들었다놨다 한다. 훈육을 한다. 보상을 한다. 박탈을 한다. 부모가 아니라 곰 조련사가 된다.


대학을 가고 직업을 가진 아이는 보상과 박탈이라는 조건이 없으면 생각도 행동도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노력에 따른 보상이 주어지지 않으면 분노한다.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철장 속 원숭이에게 특정 행동을 하면 바나나를 주다가, 특정 행동을 한 후에 바나나를 주지 않으면 원숭이가 폭력적으로 변하는 것이 심심치 않게 관찰된다 한다. 우리 인간들도 이런 모습이 심심치 않게 관찰된다. 사건사고 뉴스의 본질은 보상에 대한 기쁨, 박탈에 대한 분노다. 보상에 대한 기대와 박탈에 대한 분노는 한뿌리다. 삶의 목적은 보상이 아니다. 타인이 내게 주는 보상이 삶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서커스 곰은 결코 주체적 존재라 할 수 없다. 타자의 목적과 수단에 조련되는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조련하고 있다. 자기개발의 이름으로 우리 자신을 조련하고 있다. 적절한 보상이 적정한 시기에 주어지지 않으면 번아웃이 온다. 번아웃은 피곤한 것이 아니다. 멈춤현상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다. 가만히 있을수밖에 없는 상태다.


우리의 바람은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된다. 조건에 의해 생각하고 행동하는 존재가 되지 말아야 한다. 몹시 어렵다. 50년을 감옥에서 보낸 사람이 사회 생활을 하는 것처럼, 평생 철창과 무대를 오가며 살다가 자연 속에 방사된 서커스 곰처럼. 몹시 어렵다. 아무리 부정해도 우리는 이미 서커스 곰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문제가 풀린다. 인간은 두 부류가 있다. 자신이 곰이라는 것을 아는 인간과 자신이 인간이라 생각하는 인간. 동굴 속에서 쑥과 마늘을 먹고 인간이 되어야 할 존재는 신화 속 웅녀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문제해결의 시작은 문제를 인지하는 것이다. 삶의 목적을 생각해야 한다. 보상이라는 외부조건에 끝없이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삶을 생각해야 한다. 내가 바로 그 서커스 곰이다. 진짜 문제는 곰 스스로 자유롭고 행복하다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조건이든 스스로 만족하면 끝 아니냐라고 되물을 수도 있다. 야생의 삶을 기억하는 곰은 결코 철창 안에서 행복할 수 없다. 사냥꾼의 총에 엄마가 죽어가는 장면을 본 어린 코끼리가 있었다. 어린 코끼리는 포획되어 30년 동안 동물원에 갇혀 살았다. 30년이 지난 어느 날, 코끼리는 자신을 죽인 그 인간을 밟아 죽였다. 복수를 한 것이다. 엄마의 복수를, 자신의 삶을 이렇게 만든 것에 대한 복수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만의 이야기다. 산다는 것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는 과정이다.

부모의 역할은 아이의 이야기를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아이에게 이야기를 해주는 것도 아니다.

부모의 진짜 역할은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이야기를 하지 않는 아이가 자신만의 이야기를 마음을 담아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

듣기 싫어도 들어주는 것이다.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것이 아이를 움직이는 바람을 살랑살랑 일으키는 방법이다.


바람을 일으키려면 귀를 기울어야 한다.

귀를 귀울이려면 관심을 가져야 한다.

관심을 가지려면 무지를 자각해야 한다.

아직 여전히 알지 못함을 자각해야 귀를 기울인다.

바람을 일으키는 것은 무지의 자각이다.


코끼리가 분노한 까닭은

아무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은 탓일지 모른다.

들어주지 않으면,

이야기하는 능력은 퇴화된다.

살아가는 힘이 점점 줄어든다는 뜻이다.


어떻게 하면 힘을 키울까가 아니라,

힘을 어떻게 쓸까를 물어야 하는 시대다.


힘의 목적에 대해 질문해야

힘을 키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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