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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여자

by 피라

오랜만에 지하철을 탔다. 그것도 퇴근 시간에. 환승역은 푸쉬맨이 필요할 정도였다. 달리는 지하 공간에서 한 시간 가까이 서 있었다. 사람들은 두 부류였다. 자신의 스마트폰만 보는 사람, 눈을 감고 있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을 관찰하는 부류였다. 매일 타는 지하철과 오랜만에 타는 지하철은 다르다. 매일 타는 지하철은 피곤에 찌들어 관심없는 일상이고, 오랜만에 타는 지하철은 낯선 곳에서 시작되는 여행이다. 스마트폰을 잊고 시선이 자꾸만 외부로 향하는 이유다.


바로 앞에 젊은 여자 두 명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왼쪽에 앉은 여자가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 보았다. 화들짝 놀라 시선을 돌렸다. 두 여자의 속삭이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중국인이었다. 중국어는 “스..” 발음이 참 많구나 생각했다. 무심한 시선을 들킨지 5분쯤 지났을무렵, 두 여자가 일어났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앉으려 했다. 나의 옆구리를 밀치고 한 60대쯤 보이는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난 어정쩡한 상태에서 나머지 한 자리를 차지하려고 먹이를 덮치는 치타처럼 몸을 움직일 준비를 했다. 함께 일어났던 두 여자 중 한 명은 내리려고 출구쪽으로 가고, 나머지 한 여자는 다시 자리에 앉았버렸다. 나는 다시 앉은 여자 앞에 처음처럼 서 있었다. 헛물만 켰다. 1분쯤 지났을까? 여자가 일어나며 나에게 미소를 던졌다. 나는 아무 표정없이 그 자리에 앉았다. 일어난 여자는 내리지 않고 내 앞에 서 있었다. 상황이 이상했다. 내가 노인인 줄 알고 자리를 양보했나? 내 외모가 그 정도는 아닐텐데. 무슨 상황인지 곰곰 생각했다. 옆에 있는 친구가 내릴때 같이 살짝 일어섰던 모습을 보고 앉으려 하다 좌절했던 나를 위해 자리를 양보한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내게 살짝 미소를 지은 것 같았다. 그 짧은 찰나에 순발력을 발휘해 나도 미소를 지었어야 했는데,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버렸다. 앉자마자 책을 펼쳤다.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여자를 쳐다보고 미소로 화답할까? 웃으며 “고맙습니다”라고 말할까? “쒸에 쒸에”라고 말할까? 엄지 척을 보여줄까? 온갖 잡스럽고 소심한 상상 때문에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자는 세 정거장 뒤에 내렸다. 끝끝내 인사를 하지 못했다. 그게 계속 마음에 걸린다. 다음날 새벽 지금까지 마음에 걸린다. 중국인을 혐오하는 한국인이 많은 것 같은데, 나도 그런 인간으로 봤을까? 나는 그렇지 않은데, 그 찰나에 환하게 웃어주며 낯설고 조심스런 이국 땅에 공부하러 온 그들에게 인류애를 보여주어야 했었는데. 자리를 받기만 하고 피드백을 할 줄 모르는 사회성 떨어지는 사람 같다. 그래서 미안하다. 중국 사람을 싫어하는 한국 사람이 많은 것 같아 미안하고, 자리 양보를 받고도 답례를 하지 않아 미안하다. 지하철에서 짧은 여행을 하다 마음의 빚을 졌다. 좁쌀만한 작은 마음의 빚이 점점 커져 내 사는 마을을 덮을 것 같다.


그 상황에서 자리에 앉자마자 랜덤으로 펼친 책 페이지에 밑줄과 메모가 잔뜩 있었다.


‘델포이 신탁이 고대 그리스인에게 “너 자신을 알라”고 이야기한 이래로, 자신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성숙한 인간의 상징처럼 여겨져 있다. 실제로는 자신을 잘 알지 못하고 자신에 대해 허황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적절히 기능하기 힘들다.

남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잘 모르거나 왜곡된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어째선지 본인은 자기 자신을 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물론 때로는 자신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자신을 꽤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고 여긴다.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 모두 자신에 대해 비현실적인 환상들을 가지고 있다. 단순히 내가 나에 대해 잘 몰랐던 사실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에 본질적인 왜곡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이런 왜곡의 존재를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 마크 R. 리어리


내가 보는 나와 타인이 보는 나는 같지 않다. 수학의 교집합처럼 때때로 살짝 겹치는 부분이 나타날때도 있지만 대부분 같지 않다. 이 같지 않음이 갈등의 원인이다. 언어로 표현된 나와 타인의 생각이 다를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더 두둔한다. 이것이 차별의 발원지다. 나의 생각을 내가 낳은 아이, 남의 생각을 남이 낳은 아이라 생각해 보자. 두 아이가 서로 싸우면 무조건 내 아이 편을 드는 것과 같다. 생존본능이 이런 편향을 만든 것일까? 먹을 것을 찾기 힘든 빙하기 시절 인류 조상이 먹을 것을 발견하면 최대한 많이 위장에 집어 넣어야 생존에 유리했던 상황 때문에 불필요한 탐식을 하도록 진화된 할매국밥같은 원조 유전자의 신호일까? 아니면 현대 문명은 자아비대증이라는 숙주에서 자라는 기생충 같은 존재라 문명 존속을 위해 비교적 최근에 형성된 벤쳐 스타트업 유전자의 신호일까? 나의 생각과 타인의 생각을 모두 남의 아이라 생각하거나 모두 나의 아이라 생각하면 갈등이 좀 줄어들 수 있을까? 나의 생각을 타인의 생각이라 여기는 것은 자신을 초월한 객관화, 타인의 생각을 나의 생각이라 생각하는 것은 공동체적 인류애 같다. 생각해 보면 남의 생각을 내 생각처럼 여기는 것보다는 내 생각을 남의 생각처럼 여기는 것이 리스크도 적고 에너지 소모도 적을 것 같다. 살아가면서 마주할 수많은 다양한 타인의 생각들을 일일이 나의 생각으로 받아들이려면 타인 존재 자체, 서로 얽힌 맥락, 타인의 생각과 말 등을 정보처리해야 할 거다. 반면 내 생각을 타인의 생각으로 여기는 건 훨씬 간단하다. 상대해야 할 사람이 나 한 명뿐이니까.


애머슨, 소로로 회자되는 19세기 미국의 초월주의는 존재의 초월이 아니라, 생각의 초월 아닌가 싶다. 나를 넘어서는 초월이란 나의 생각을 타인의 생각처럼 여기는 태도가 첫 단추 아닐까. 자리를 내게 양보하는 그 중국인 여자에게 미소로 화답하지 못한 이유를 알겠다. 내 생각 안에 내가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것이다. 내 생각을 타인의 생각처럼 여기는 건 내 생각으로부터 내가 풀려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자유로워진다는 뜻이다. 생각하는 것은 즐거움이다. 하지만 즐거움에 매몰되면 발견의 즐거움이 줄어든다. 나의 생각을 수많은 타인들의 생각 중 하나로 여기게 되면 발견의 즐거움에 매일매일 설렐 것 같다. 내 생각을 타인에게 던져 그들의 것과 똑같이 여기면 낯선 것들과의 상호작용이 일어날 거다. 가마솥에서 40년째 계속 고와 우려내는 3대 비법 곰탕 국물같은 내 생각은 별 새로울 것이 없다. 내 가마솥에 새로운 재료를 집어 넣는 것보다 남이 우린 다양한 국물을 맛보는 것이 더 즐겁다. 자아가 강한 것과 자기 의견이 분명한 것은 구분되어야 한다. 자기 생각이 분명하고 그것을 명료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권장되어야 한다. 표현하고 피드백을 나눌 때 인간은 배우고 성장한다. 자신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잘 표현하는 것이 일상의 습관이 된 사람은 자아가 강하지 않다. 그들은 너그럽다. 그들은 다름에 대해 열려 있다. 표현에 인색한 사람들의 자아는 비정상적으로 강한 법이다. 수다쟁이 연쇄살인범은 쉽게 상상하기 힘든 이유다. 성장은 자아가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흐려지고 유연해지는 과정이다. 아루나짤라의 마하리쉬는 말했다. 자아는 버림으로써 찾는 것이라고. 버려야 할 것이 끝없이 나오는 화수분이다. 이 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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