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첫 배낭여행 항공권은 카이로로 들어갔다가 런던에서 나오는 6개월 오픈티켓이었다. 비행기표 가격은 65만원이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에서 한 달 보름 정도 머물렀다. 카이로에 도착해 3일 정도 무척 힘들었다. 물건의 정해진 가격도 없고 들쑥날쑥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엉망이었다. 친절한 시민인지 영악한 삐끼인지 알 수 없는 미소로 다가오는 이집트인의 속내도 알 수 없고 살아가는 방식이 한국과 너무나 달랐다. 여행은 변화에 관한 일이다. 덥고 지치고 혼란스러워 하루라도 빨리 떠나고 싶었던 이집트가 좋아진 것은 첫 배낭여행이 내게 준 선물이었다. 진절머리나게 싫은 것도 애틋하게 좋아질 수 있다는 알았다.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시나이, 룩소르를 여행하며 이집트에서 도끼자루 썪는 줄 모르며 지내다가 다음 행선지를 생각했다. 일단 예루살렘을 가서 방향을 결정하기로 했다. 동쪽으로 가면 시리아, 요르단, 터키이고 서쪽으로 가면 그리스, 이탈리아, 루마니아다. 한 달 넘게 서쪽이냐 동쪽이냐를 고민했다. 요르단, 터키를 가고 싶었다. 런던으로 가야 귀국할 수 있으니 동쪽으로 갔다가 다시 서쪽으로 가면 예산 문제가 생겼다. 돈을 아낀다는 단순한 기준, 돈을 아껴야 여행을 더 오래 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다하브에서 국경을 넘어 에일랏으로 갔다. 버스를 타고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예루살렘에서 보름 정도 머물다가 하이파에서 크레타로 가는 배를 탔다.
그때 동쪽으로 가지 않은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후회의 이름은 동경이다. 간 도시보다 가지 않은 도시의 이름이 더 설렜다. 터키에 가고 싶다.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이란, 이라크 여행을 동경한다. 그때 만약 동쪽으로 갔더라면 그것 때문에 내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필받아 동쪽으로 동쪽으로 가서 육로로 상하이까지 왔더라도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가지 않은 길이 더 생각나는 법이라 역사의 가정은 현실을 왜곡한다. 이젠 여행을 하고 싶은 마음도 말라간다. 움직이는 여행에서 존재하는 여행으로 무게 중심이 바뀐다. 여행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면 장소는 상관없다. 장소성을 초월한 여행. 그걸 삶이라 부른다.
그럼에도 가끔 생각하면 설레는 장소가 있다. 그곳의 공기를 마시고, 그곳의 소리를 들으며, 그곳의 변화를 보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래오래 가만히 존재하고 싶은 곳이 있다. 이스탄불의 아잔 소리를 아침 저녁 들으며 한 숙소에서 한 달 지내고 싶다. 다마스쿠스 하미디야 시장을 매일 어슬렁거리며 한 달을 보내고 싶다. 그런 날이 올지 모르겠다. 그런 날이 오지 않아도 좋다. 상상 속의 나는 이스탄불에서, 다마스쿠스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두 도시가 매일 떠오르지는 않지만, 떠오른 날은 어김없이 상상속 여행을 한다. 가는 상상이 아니라고 그곳에 존재하는 상상이다. 매일 매일 상상이 조금씩 달라진다. 같은 곳에서 같은 노을을 보아도 하루도 같은 노을이 없듯이. 여행을 상상하면 현실의 삶도 여행처럼 변한다. 매일매일 똑같은 날이 없다. 매일매일 새롭다. 순간순간 새롭다. 낯선 풍경 속에서 똑같음을 발견하는 여행보다 익숙함 속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는 여행이 좋다. 그런 점에서 일상은 진정 여행이다. 발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이만 있을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