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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by 피라

지난 주말에 부석사에 다녀왔다. 두번째다. 2002년이 처음이니 23년만이다. 무량수전을 처음 보았을 때의 강렬한 느낌을 잊지 못한다. 산사같은 목조건물을 적지 않게 보았지만, 큰 감흥은 없었다. 언제나 그랬다. 건물은 그곳에 있었고, 나는 이곳에 있었다. 건물은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고 싶지 않았다. 나도 건물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 건물과 나는 다른 세상에 존재했다. 나와 상관없는 존재였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라는 편견 때문인지 무량수전은 뒷통수를 때리듯 마음 속으로 훅 들어왔다. 오랫동안 무량수전을 떠나지 못했다. 떠나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오래오래 그곳에 머물고 싶었다. 노을도 보고 하늘이 깜깜해지고 숲이 암흑이 될때까지 꼼짝않고 싶었다. 어둠 속에 천천히 천천히 내가 물들어가는 시간의 흐름을 예민하게 느끼고 싶었다. 밝음이 알려주지 않는 이야기를 어둠이 속삭여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 난 노을도 보지 못했고, 어둠을 상상하기만 했다. 에개해 갑판 위에서 꼼짝않고 5시간 동안 낮이 밤이 되어 사라진 지평선을 바라볼때와 비슷했다. 그 뒤로 무량수전을 떠올리면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끝없는 이야기들이 함께 떠오른다. 어떤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마음이 빠져들고 즐거워진다. 무량수전은 모르기 때문에 재미있음이 어떤 느낌을 얼핏 가르쳐주었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20년전의 무량수전은 그 어떤 색도 입혀지지 않았다. 지난주의 무량수전은 치자색 물든 밀가루 반죽같은 색이 칠해져 있었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20여년전 부석사 초입의 은행나무는 수령 10년도 되지 않은 것 같았다. 모 작가의 부석사 초입의 아름다운 은행나무길이라는 말을 마음에 담았다가 무척 실망했었다. 과도한 내 상상탓인지,최근에 식재한 어린 은행나무라는 설명을 하지 않은 탓인지. 실망을 안겨준 은행나무들이 제법 자라 있었다. 영주 지역 여기 저기 홀로 우뚝 선 500년도 넘은 은행 나무 몇몇이 눈에 띄었다. 무량수전 외벽에 칠한 색은 늦가을에 물든 은행나무잎 색과 닮았다. 색은 닮았지만, 길가에 떨어져 여러번 밟힌 은행나무 잎 하나만큼의 감동도 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무슨 이유 때문에 힘들게 색을 입혔는지 궁금했다.


산과 하늘의 시간은 곡선이고, 배흘림 기둥의 시간은 직선이다. 자연은 순환하며 탄생과 죽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자연에서 분리된 목재는 늙어가기만 한다. 인간이 베어내었으니 새롭게 탄생시키는 것도 인간의 몫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무량수전은 100년은 더 건재할 것이다. 무량수전의 ‘무량수‘는 수많은 생명들을 뜻한다 한다. 영원히 지속되는 한 생명이 아니라, 세상은 떠받치는 수많은 생명일 것이라 믿는다. 영원하고 싶은 한 생명은 수많은 다른 생명을 희생시키는 법이다. 생명의 길, 인간의 길이 아니다. 세월이 흐르면 구조를 떠받치는 부분들이 드러나는 법이다. 늙어가는 인간도 삶을 지탱하는 허약한 구조가 하나둘 드러난다. 목재와 인간은 늙어가며 서로 닮아간다. 베어진지 700년이 넘은 저 기둥처럼. 무량수전을 처음 보았을때의 알지 못함의 앎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들은 저 기둥 속에서, 기둥 표면에서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듯하다. 세상을 지탱하는 것은 알려진 이야기가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앎이 아니라, 알지 못함. 무지에 대한 앎,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싶어하는 마음이 인간 세상과 삶을 지탱하는 힘이다. 아직 쓰러지지 않은 저 기둥처럼. 여전히 알지 못하는 것이 많다는 자각 때문에 삶은 아직 쓰러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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