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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 라디오

by 피라

공간을 채우는 건 물건이 아니라 소리다. 아무리 많은 생활 집기와 취미 물건이 가득찬 공간도 소리가 없으면 텅 빈 공간이다. 공간을 채우는 소리는 두 가지다. 인간의 소리와 비인간의 소리다. 내가 라디오를 사랑하는 이유는 비인간인 물건에서 나오는 소리이지만 인간의 소리도 나기 때문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라디오를 들었다. 듣고 싶어 들은 것이 아니다. 집에는 항상 라디오가 소리가 나왔다. 티비가 귀한 시절이라 그때의 라디오는 지금의 컴퓨터, 스마트폰, 티비, 넷플릭스, 유튜브, SNS의 역할까지 했다. 나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사람의 말과 음악을 들으며 자랐다.


퇴직 후, 어릴때처럼 라디오를 들으며 하루 하루 자랐다. KBS 클래식 FM 전파가 공간을 채웠다. 7년 동안 게스트하우스 공간을 채운 주인공도 클래식 에프엠이었다. 조그마한 주택 공간이라 스테레오보다는 모노가 어울렸다. 티악 모노 라디오가 충실하게 공간을 완성해주었다. 서점 리모델링을 하며 티악이 고장난 걸 알았다. 살릴 수가 없었다.


마땅한 라디오를 하나 찾았다. 산진 라디오. 새건 20만원을 육박했다. 16만원짜리 해외배송 최저가를 찾아 결제를 했다. 한 달이 지나고 오지 않았다. 판매자에게 배송 예정일을 몇 번 물었지만, 아무런 답이 없었다. 어떤 피드백도 없어 결제를 취소했다.


정진우 선생님이 서점에 방문했을 때, 하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10만원이나 들어 있었다. 서점 개업 선물을 미리 받은 것 같았다. 너무 고마워 다음 날 아침, 봉투에 짧은 시를 써내려갔다. 시를 쓰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시가 흘러나왔다. 이 고마운 마음이 담긴 귀한 돈을 어떻게 써야 잘 쓰는 것일까 생각했다.


그래, 라디오야.

당근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산진라디오를 발견했다. 다음 날 저녁 라디오가 담긴 상자를 받아들고 있었다. 판매자는 내용물을 봐야 하지 않나 물었지만, 나는 괜찮다며 열어보지도 않고 박스를 받아왔다. 나는 믿었다. 모노 소리를 좋아해 라디오를 듣는 사람은 거래 사기같은 것은 꿈도 꾸지 않을 거라는 걸. 라디오가 들었다는 박스를 열어보지 않은 이유다.


산진라디오의 모노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는 명성대로였다. 지금까지 들은 어떤 라디오 소리보다 좋았다. 단아하고 묵직했다. 서점 공간을 완벽하게 채우는 소리였다. 꿈에 그리던 소리다. 아침에 서점으로 출근하면 라디오부터 켠다. 소리가 공간을 채워 하루를 완성시키면 행복해진다. 스테레오 시대지만 나는 모노가 좋다. 모노의 존재감이 더 깊다. 모노는 스테레오보다 화려하지 않지만 훨씬 명료하다. 그 명료함을 닮고 싶다.


매일 모노 라디오를 듣는다. 그때마다 흰 봉투가 떠오른다. 그 비오던 날 왔다간 사람이 떠오른다. 나눴던 대화들이 떠오른다. 음악은 기억을 추억으로 만드는 마법사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삶이 실린다. 이 순간이 추억이 된다. 찰나에 지나간 시간은 찰나의 미래가 되어 이 순간을 채운다. 흘러나오는 저 선율을 받아들이는 순수한 감각이 삶의 본질임을 깨닫는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



그런 라디오를 내일 또 들을 생각하면 자꾸만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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