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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적아빠 Aug 29. 2021

380만 원을 벌어도 남는 돈이 없어 part2

 10년 전에 내가 신용불량자가 된 계기는 바로 '신용카드'를 사용하면서 시작되었다.



 편리하게 쓰이던 신용카드였지만, 나중에는 카드값을 막지 못하게 되면서 신용불량자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마치 흥청망청 써서 그렇게 된 것처럼 보이겠지만, 살다 보면 급하게 돈을 지불해야 할 때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때마다 신용카드를 정말 기똥차게 잘 활용한 덕분에 결국은 '신용불량자'가 됐었다. 하하하! ^^

 지금이야 웃을 수 있지만, 참 바보 같은 행동들을 했던 때였다.


 신용카드가 없었을 때는 갖고 있는 돈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했다.


 그리고 돈이 없으면 다음 달에 돈을 벌 때까지는 남은 기간 동안에 아껴서 살았다. 당장 필요한 물건들이 있어도 며칠은 참고 살았다.


 하지만, 신용카드가 생긴 뒤로는 전혀 기다릴 필요가 없어졌다. 돈이 없어도 살 수 있는 마법의 카드가 있으니까. '선결제 후지불'이라는 패턴으로 완전히 바꾸어버린 마법의 신용카드가. 


 그래서 당장에 돈이 없더라도, 갑자기 가전제품들이 망가지거나 또 다른 제품들이 필요할 때, 자동차의 갑작스러운 고장, 갑작스러운 가족들의 병원비, 갑자기 생긴 경조사비, 부모님의 생신이나 가족들의 생일, 급하게 필요했던 물건들까지, 이런 상황들이 생길 때마다 요긴하게 카드를 사용했었다.


 이런 지출들이 평소의 생활비들과 합쳐지면서 1년 동안 조금씩 결제해야 할 금액들이 늘어나더니, 결국에는 연체 이자들과 함께 금액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버렸다.


 그 달의 카드 대금을 다 막지 못하면, 남은 원금과 연체 이자는 다음 달로 계속 밀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연체이자가 또 다른 이자를 낳는다. 나의 경우에는 첫 달에 막지 못한 금액이 10만 원 정도 됐었지만, 뜻밖의 지출들이 점점 이어지면서 막지 못하는 금액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진짜 바보 같았다. 그때는 왜 꼭 카드를 써서라도 써야 할 곳에는 꼭 써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는지 참 한심할 뿐이다.


 경조사에 갈 때도 돈이 부족하면 조금만 내고서 밥은 먹지 않고, 일이 있어서 먼저 간다고 그냥 오던가, 부모님 생신처럼 기념일 같은 경우에도 사정을 얘기하고서 적당히만 해도 됐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조차도 다 카드를 써가며 평소처럼 했었으니, 지금에 와서 그때 당시 내가 갖고 있었던 사고방식들을 떠올려보면 참 한심하게만 여겨질 뿐이다.




 10년 전에 맞벌이로 380만 원을 벌었으니, 카드를 그렇게 썼어도 충분히 갚고도 남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맞는 말이다. 380만 원을 모조리 카드빚을 갚는데 썼었다면 막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월급을 받으면 바로 빠져나가는 항목들이 이미 수두룩 하게 존재한다


 카드를 막는 비용은 제일 마지막에 남는 돈으로 아마 다들 내고는 했을 것이다. 그러니 카드 대금이 모자라서 못 냈던 경우들이 다들 몇 번씩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막을 돈이 부족할 때마다 제일 하기 쉬웠던 '현금서비스'로 채우고는 했을 것이다. 


 지금 당장은 현금 서비스로 막았다고 안도하겠지만, 1~2달 후에는 더 심각한 상황이 몰려온다. 현금서비스의 경우에는 이자가 더욱 사악하기 때문이다. 기본 이자도 사악한데 연체되기 시작하면 그냥 날 강도 수준이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계속 밀리다 보면 나중에는 이자가 아닌, 꼭 '원금'처럼 보이는 말도 안 되는 상황까지도 올 수가 있다.


 그렇게 밀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점점 신용불량자의 늪에 빠져버리게 되고, 나중에는 채권회사의 독촉을 받아 스트레스로 인해서 삶은 점점 피폐해지고, 불행해지기 시작한다.

 





 현금서비스는 '진짜! 진짜!'로 사용하지 말자. 차라리 제도들을 통해서 낮은 금리로, 은행에서 100만 원이라도 대출을 받아서 카드를 막고, 지출을 조금씩 줄이도록 하자. 


 근로자라면 나라에서 지원해주는 대출 제도들이 간혹 있으니 한 번 알아보도록 하자. 요즘은 코로나로 인해서 소상공인이나 근로자들의 대출제도가 좀 더 좋아졌다. 금리도 1.5%대 정도로 낮으니 이리저리 검색해보고서 이용해 보도록 하자. 이미 상황이 악화됐다면 신용회복, 개인회생, 파산신청을 이용하고.


 일정하게 들어오는 수입 이외에 또 다른 수입이 없다면 이미 연체된 돈들을 갚을 여력은 아예 없는 것이다. 괜히 급하다고 금리도 높은 것들을 쉽게 이용하지는 말자.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나에게 이자 폭탄이 되어 돌아온다.


 나는 신용불량자가 됐던 당시에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이런 상황들이 발생한 것인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런데 해답은 정말 시시한 곳에 있었다.


 수입은 일정하게 똑같은데 '신용카드'를 쓰다 보니 나도 모르게 지출이 점점 많아졌던 것이다.


 신용카드를 긁다 보면 당연히 지출이 늘어나게 되어있다.

 지갑에 있는 돈을 꺼내어 쓰는 게 아니다 보니, 일정한 금액을 생각하고 쓰겠다는 계산 자체가 둔해지기 때문이다. 대충 감으로만 내 월급 내에서 능력껏 쓰다 보니, 남겨두는 '여유돈'이라는 개념이 아예 사라지게 되었다. 그래서 갑작스러운 지출들에도 카드를 쓰게 된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갈수록 당연히 지출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패턴이었다.


 헌데, 정말 웃긴 점은 그렇게 써왔던 평균 카드 결제대금들이, 당연한 우리의 '평균 생활비'인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는 데 있다.


 그때 당시의 나는,

 꼭 필요한 곳에만 돈을 썼었기 때문에,

 사치라고 생각되는 곳에 쓴 돈은 없었으니까,

 남들도 이런 곳에는 다들 쓰고 있으니까,

 그래서 그게 당연한 생활비 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정도의 돈을 지출'하는 것이 사치 생활일 줄은 당시에는 꿈에도 몰랐었다.

 당시의 나는, 언제든지 '채무자'가 될 수밖에 없는 생활을 스스로 이어왔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회 분위기에 휩쓸려서, 똑같이 지출했었던 그 모든 것들이 전부 사치였었다. 남들도 다 그렇게 했기에 스스로 못 느꼈을 뿐이다.






 우리 부부가 10년 전에 380만 원을 벌어서 어디에 지출했었는지 '표'를 통해서 보여주도록 하겠다.


 나중에는 너무 답답해서 다른 사람들이 돈을 어디에 쓰고 있는지 한 번 알아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모두들 지출하는 항목에는 별반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다만, 액수에서 그 차이가 많이 났었는데, 이건 나중에 다른 표를 통해서 따로 설명을 하도록 하겠다.


 지금 표에 있는 항목들은 '다른 사람들이 돈을 지출하는 내역'들을 알아봤을 때, 다른 사람들이 지출하던 항목들도 포함되어있으니, 나에게 해당되지 않는 항목들은 그냥 참고만 해주길 바란다.


 그럼, 우리 부부의 '10년 전 지출 내역'을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이 때는 자녀도 한 명만 있었던 때였다.


 위 지출내역의 합이 392만 원이었다. 그래서 마이너스 12만 원이다.

 이렇게 수입이 들어와도 순식간에 380만 원이 사라져 버렸다. 


 우리 부부의 10년 전 지출 내역 중에서,

 먼저, 경조사/모임과 부모님 용돈에 대한 의문이 드는 분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것 말고 나머지 항목들은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비용들 이니까.


 먼저 경조사 비용이 저만큼 들었던 이유는 우리 부부의 친척들이 그만큼 많아서다.

 부인 같은 경우는 사촌 동생들 즉, 처제, 처남들을 다 합치면 20명이 넘어 버린다. 거기다 사촌 언니, 오빠들까지 있으니, 나도 수년이 지나서야 겨우 이름들을 다 외웠을 정도였다. 그전까지는 다시 만날 때마다 이름을 까먹었었다.


 장인, 장모님이 그만큼 대가족이었다. 게다가 내 쪽의 사촌들 또한 적지 않았다. 부인의 3분의 1 정도는 됐으니까.


 여기에 사촌 이외의 친척들까지도 경조사들을 다 다녔으니, 경조사가 몰리기라도 하면 거의 공포스럽기까지 했었다.


 게다가 그때 당시 인연을 이어오던 친구들과 선배, 후배들의 수도 꽤 됐었고, 또, 각자 다니고 있던 직장의 인원수 또한 전혀 적지가 않았었다.


 모두들 알다시피 30대 초중반의 나이대가 주위에서 '군대, 결혼, 돌잔치, 장례, 환갑, 칠순' 등의 경조사가 꽤 많이 생기는 나이대다.


 군대는 왜 넣었냐면 군대 갈 때 용돈을 주니까 넣었다. ^^ㅋ

 그리고 경조사가 맞다. 누군가는 축하해주고 누군가는 슬퍼하니까. ^^;;


 경조사가 생기면 선, 후배 같은 경우에는 부조만 해도 되지만, 친척, 친구들은 꼭 가야만 한다. 그래서 부조도 더 해야 하고, 회사조차도 별로 친하지 않더라도 동료들의 경조사비는 꼭 내야만 하는 것이 사회의 분위기다. 그러니 우리 부부에게는 저 금액이 오히려 가능한 한 적게 내고 있었던 금액이나 마찬가지였다.

[ 부조 : 잔칫집이나 상가에 돈이나 물건을 보내어 도와줌 ]


 그래서 그때 당시 들어갔던 경조사 비용들과 모임 비용들을 총 계산해봤더니, 진짜로 한 달에 평균 '35만 원 이상'을 쓰고 있었다.


 저 비용보다 더 적게 내고 싶었어도 모든 경조사 비용을 다 5만 원으로 통일할 수도 없고, 게다가 모임들을 계속 빠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정말로 진퇴양난의 시기였다.

[ 진퇴양난 :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음 ]






 그리고 두 번째로, '부모님 용돈'은 항목에 저렇게만 썼을 뿐이지, 어머니가 아이를 돌봐주셨기에 드렸던 돈이었다.


 그때 당시 첫째 아이 하나만 있었는데, 어린이집에 보냈던 부모들은 아마 잘 알 것이다.

 어린이집에 너무 아침 일찍부터 보내도 안되고, 너무 저녁 늦게 데려와서도 안된다. 아이들이 진짜 녹초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직장에서 하루 종일 생활하다가 오는 거랑 똑같다고 보면 된다. 절대 다르다고 생각하지 말자. 어린이집에 오래 있는 여러분들의 아이만 점점 더 불행해질 뿐이니까.


 우리가 직장에서 반차만 쓰고 왔을 때와 야근까지 하고 밤늦게 왔을 때의 기분을 떠올려보며 비교해 보자.

 아이들도 완전히 똑같다.

 

 네 명의 아이들을 다 어린이집에 보내면서 그 기간 동안, 어린이집에 오래 있는 아이들을 자주 볼 기회가 많이 있었는데 진짜 애들이 너무나도 불쌍해 보였다. 그냥 얼굴 자체에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런 현상은 어린이집에서 오래 지냈었던 모든 아이들에게서 볼 수 있었던 특징이었다.


 그저 멍하니, 무표정한 얼굴로 선생님이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고, 혼자 장난감을 만지고 있거나, 누워있거나, 멍 때 리거나 그 나이대 아이들에게서 늘 상 보이는 해맑은 웃음을 그 아이들에게서는 자주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기보다 일찍 하원 하는 아이들을 부럽게만 바라보던 그 눈망울들, 때로는 서럽게 울고 있던 아이들까지도 난 너무도 잘 기억하고 있다.


 진짜로 그런 모습들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아플 수밖에 없다. 


 어린이집에서 하루 종일 생활할 거라면, 현재 보호자가 없어서 시설에서 생활하고 있는 아이들과 무엇이 다른 걸까?
 저녁을 가족과 함께 먹고, 잠만큼은 집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을 먹는 게 차이라면 차이인 걸까?


 그래서 다른 아이들은 우리가 어떻게 해주지는 못하겠지만, 우리 아이만큼은 그렇게 하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어머니 찬스를 썼었다.



 그래서 나의 어머니에게 아이를 부탁드렸다. 그랬더니 어머니께서도 흔쾌히 승낙하셨다. 어쨌거나 어머니도 인생에서 첫 손주였기 때문에 로망 같은 게 있으셨으니까.


 내가 아침에 출근하기 전에 첫 째 아이를 어머니께 데리고 가면, 어머니는 잠시 돌봐주시다가 아침 10시까지 어린이집에 데리고 가셨다. 그 후 할 일을 하시고서 오후 4시쯤 다시 데리고 오셨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는 동안에는 어머니는 아르바이트 같은 일도 하시고, 볼일도 보시고, 친구들도 만나시고, 취미 생활도 하시곤 했다. 그래서 부족한 생활비는 그렇게 우리가 용돈으로 드렸던 것이다.


 어차피 남에게 맡겨도 그 정도의 돈은 들어간다. 남보다야 할머니가 곁에 있는 것이 아이에게도 여러모로 좋았기에 그런 선택을 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매우 잘한 선택이었다. 비록 그 비용으로 인해서 그때 당시 신용불량자의 늪에 더 빠져버렸지만, 그래도 그때 그렇게 했기 때문에 우리 첫 째 아이가 밝게 자랄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 또한 어머니에게 맡기기 전, 처음 어린이집에 보냈을 때 우리의 출근, 퇴근 시간에 맞춰서 아침 8시 10분부터 6시 50분까지 어린이집에 한 동안 맡긴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정말로 그 어린아이가 아침마다 어린이집에 대한 거부 반응이 장난이 아니었다. 아마 그대로 뒀다면 지금처럼 해맑고, 활발하고, 밝은 성격의 첫째는 없었을 거라고 장담하고 있다.


 그때 우리 부부가 관심을 갖고서 이리저리 육아에 대한 경험담 등을 찾아보고, 좋은 방법들을 검색도 해보고, 고민 또한 많이 했었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선택해서 실행을 할 수 있었다.


 10년 전이라서 '돌봄 제도'도 거의 없었던 때였다. 지금은 '아이 돌봄 제도'들도 잘 되어 있으니 한 번 찾아서 이용해 보시길 추천한다. 너무 어릴 때는 낯선 환경과 낯선 이들이 많은 어린이집보다는, 자신의 집이 아마도 더 익숙하고, 편안할 거고, 포근한 안정감까지 느껴질 테니까 말이다.


 게다가 돌봄 제도를 이용하면 보육 선생님과도 1:1이다. 엄마까지 가세하면 2:1이 될 수도 있다. 1:1이 더 불안하다고 생각한다면 CCTV를 설치하면 된다.


 어린이집 같은 곳은 아이들을 위해서 좀 더 성장한 후에 보내도록 하자. 그리고 보내게 된다면 너무 오래 머물게는 하지 말자. 아이들은 가족들의 품에서 가장 큰 행복을 느낀다♡


 엄마, 아빠라면 항상 1순위는 돈보다는 가족이어야 한다.
 돈은 다시 벌 수도 있고, 없어도 살아갈 수 있지만,
 가족은 돈 주고도 못 구하고, 만약에라도 없어지면 평생 가슴속에 아픔으로 남아, 살아도 사는 게 아니게 된다.




 그때 당시, 어머니는 저 45만 원을 받으셨어도 아이에게 어느 정도의 돈을 쓰셨었다. 굳이 그러지 않으셨어도 어머니에게 드리는 저 돈이 전혀 아깝지가 않았었는데, 더 아깝지 않은 돈이 됐던 것이다.


 역시 가족은 남들과는 비교 불가다.


 이렇게 해서 10년 전에 경조사/모임 비용은 35만 원 이상, 부모님 용돈은 45만 원이 지출됐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은 그 정도로 지출되지는 않는다. 10년 전과 지금은 여러모로 많이 다르니까.


 다음 편에서는 '현재 달라진 지출 내역'에 대해서도 표를 보며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다.


 지금은 10년 전보다도 더 적게 벌고 있지만, 빚도 갚고 있고, 저축도 하고, 여유 돈도 남고 있는 것에 대해서 하나씩 천천히 얘기해 보도록 하겠다.



# 380만 원을 벌어도 신용불량자가 된 썰 part1https://brunch.co.kr/@pirates/24

# 380만 원에서 270만 원으로 살게 된 썰 part3https://brunch.co.kr/@pirates/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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