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엄마 때문에 선생을 했어.

엄마를 위해서

by 물고기

엄마, 엄만 자꾸 엄마가 죄인이라고, 엄마가 잘못했다고 하잖아.

아니야, 엄마.

엄마가 자랑할 수 있는 딸이 되고 싶었던 건 내 선택이었어.

그건 나의 선택이었어.



아빠는 수도 없이 직장을 옮겼고 엄마는 항상 힘들었잖아. 그런 엄마를 보며 엄마가 든든해할 만한 직업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한 건 나였어.


열다섯이었고. 그러니까 20년 전이었는데 말이야. 도서관 휴게실에 앉아 친구에게 라디오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어. 근데 그건 정식 경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자리 잡기가 쉽지 않다고, 또 내가 공부를 조금만 덜 잘하면 아쉬움 없이 라디오 작가를 택하겠다는 말도 했어. 되게 건방진 이야기지만.

난 글 쓰는 걸 좋아했고, 방송을 좋아했잖아. 새벽까지 라디오를 끼고 살던 걸 엄마도 알잖아. 그런데 방송작가나 라디오피디가 되고 싶다는 꿈을 접은 건 엄마 때문이었어. 나는 공부를 곧잘 했고, 그렇게 계속 노력하면 사회에서 말하는 ‘성공’에 가까운 전문직을 할 수도 있었으니까.

기준은 엄마였어. 나는 엄마가 더 이상 슬프지 않길 바랐어.

그래서 엄마가 자랑스러워할 만한, 아니, 엄마가 어디 가서 자랑하지 않더라도 남들이 우릴 쉽게 볼 수 없는 직업을 가지고 싶었어. 엄마를 위해서. 오직 엄마를 위해서.


엄마는 자꾸 엄마 때문에 선생 했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는데 나 엄마 때문에 선생 한 거 맞아.


아직 가족 중 아무도 이렇다 할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던 십몇 년 전, 내가 그때 어떤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영어를 좋아하니 선생을 하고 싶지 않아도 영어교육과면 비슷하겠지,라고 생각한 건 나의 판단 오류였어. 임용 합격률이 가장 높다는 시골의 국립대. 그곳에서 시간을 보낸 후 다른 진로의 가능성은 쉬이 보이지 않았어.


난 대학에 다니는 동안에도 교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스물둘, 그러니까 우리가 집도 없고 차도 없던 그 시절에 내가 임용고사를 안 볼 순 없었어. 그리고 모두는 내가 대학에 입학할 때부터 이미 내가 교사가 된 것처럼 대했으니까.


그때 난 정말 선생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시험을 보니 붙어 버렸고 (엄마가 항상 말하는 것처럼 난 똑똑하니까), 엄마가 기뻐한다는 사실이 좋았어.


그래서 그랬어. 스물셋 첫해 때 내가 학생한테 맞을 뻔하고 온갖 폭언을 들었던 그 사건을 엄마에게 말하지 않은 것도 그것 때문이었어.


난 그저 엄마가 내가 선생이라는 사실로 기쁘기만을 바랐어. 그것 때문에 슬퍼하기를 바라지는 않았어. 내가 선생인 것이 엄마를 슬프게 하는 이유가 되면 안 됐어.




남들이 무시하지 않는 집안이 되어간다는 느낌이 좋았어.

응. 어렸을 땐 그런 느낌을 조금, 아니 많이 받았던 것 같아. 하지만 나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중등 임용고시에 떡 하니 붙어 버렸고, 오빠는 몇 년 후 의사가 되었지.


아들은 의사고 딸은 선생이야? 아유 자식 잘 키웠네.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게 좋았어.

엄마는 내 기대와는 달리 밖에서 우리 자랑을 하지는 않는 눈치였지만 어쩌다 알게 됐을 때 사람들의 반응, 눈빛 그런 거 있잖아. 엄마를 부러워하고 약간은 우러러보는 것. 엄마가 그런 것에서 기쁘고 행복하길, 더 이상 오래전 기억 속 장면처럼 슬프지 않길 바랐어.


엄마. 근데 내가 많이 슬퍼졌어.

이게 나한테 많이, 아주 많이 안 맞는 일이었더라고.


처음부터 느꼈고, 해가 갈수록 더 나빠지기만 해서 나는 어떻게든 벗어나 보려고 했어.

그런데 그냥 백수가 될 순 없으니까 다른 대안을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어. 그 모든 게 실패로 끝나 학교로 다시 돌아올 때 나는 많이 괴로웠어.


서른둘쯤엔 ‘이젠 정착해야겠구나’라고 포기하고 이 직업도 나쁘지 않다고, 개중에 내가 좋아하는 점들로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지. 다른 길을 가기엔 이미 너무 늦은 나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세상에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나도 그렇게 적당히 순응하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난 이제 교사가 그렇게 괴롭지 않다고 말하고 다녔고 나도 그렇게 믿었어. 통증이 나타나기 전까진.


2018년 2월. 내 몸은 작동을 멈췄어.

온몸에 통증이 올라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온갖 검사를 해보아도 의학적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고, 그 끝에 내가 받아 든 병명은 섬유근육통.

나는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어.


그렇게 아픈 지 2년 반이 되었어.

그리고 내가 그동안 글을 좀 썼는데, 글을 쓰면서 내가 중요한 사실을 알아버린 거야.

내가 매년 2월에 상태가 더욱 악화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건 모두 3월의 새 학기 스트레스 때문이었다는 것.

엄마. 그냥 일 때문이 아니라 정확히 선생 일 때문에 내가 아팠어.

내가 요새 나아지고 있는 건 단지 그게 무슨 직장이든 그만둔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져서가 아니라 정확히 ‘학교’를 그만둔다고 결심해서야.

그건 너무 명백한 사실이야.



그러니까 엄마, 난 엄마에게 묻고 싶어 졌어.

엄마는 지난 12년간 조금은 행복했어?

그래도 딸이 안정적이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어서 마음 한편이 조금은 든든했어?


아주 조금이라도, 10%라도 엄마가 그 이전보다 덜 슬퍼졌다면 난 그걸로 될 것 같아.

이제 내려와도 괜찮을 것 같아.


내가 학교에 있었던 12년 동안, 엄마가 조금이라도 덜 슬펐길 바라.

그게 열다섯의 내가 바랐던 목표였으니까.


그리고 내가 학교에 있지 않을 앞으로의 긴 시간 동안엔

엄마와 내가 둘 다 지금보다 덜 슬프고 더 기쁘길 바라.

우린 더 행복해질 거야. 난 그걸 믿어 의심치 않아.


2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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