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발령지에서의 3년 2008-2010
스물셋, 초임, 게다가 남자중학교 2학년 담임. 중학교 중에선 남자중학교가 가장 힘들고, 그중에선 그 이름도 유명한 중2병 아이들이 천하무적 트러블메이커라는 것은 직접 겪고 나서야 알았다. 사람들은 그 어렵다는 시험을 한 번에 붙었다며 나를 칭찬하곤 했지만, 나의 스물셋은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인생의 암흑기였다.
당연히 모든 것이 서툴렀는데, 나이 어린 여자 초임교사는 남자 중학생들의 좋은 먹잇감일 뿐이었다. 아이들은 처음엔 나를 좋아했다. 이유도 알 수 없이 너무나도 열렬히 애정을 표현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등을 돌리더니 나를 끊임없이 미워하기 시작했다. 살아오며 그렇게 많은 이들에게 미움과 공격을 받아본 것은 처음이었다.
젊은 교사가 아이들과 트러블이 생기는 과정은 거의 비슷하다. 처음에 아이들은 무조건적인 지지와 애정을 표현하고, 교사는 가르치는 일이 처음이니 모두에게 친절하고 무르게 대한다. 하지만 학교에는 반드시 아이들을 지도해야 하는 일들이 생긴다. 사소한 지각이나, 교칙에 관련한 수많은 생활지도까지 감정으로 엮이는 일들이 하루에만도 수 십 건이다. 젊은 교사에게 무조건적인 지지를 표하던 아이들은 그가 이런 업무를 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등을 돌리기 시작한다. ‘변했다.’ ‘자기 좋을 대로(꼴리는 대로) 한다.’ ‘차별이 쩐다.’는 식의 말을 하며 자신들에게 웃어주기만 하던 햇병아리 교사가 그 똑같은 얼굴로 벌점카드를 날리고 화를 낸다는 사실을 참지 못한다. 나는 뼈아픈 경험으로, 3월 한 달은 학생들에게 웃어주면 안 된다는 선배교사들의 조언이 다 일리가 있는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웃어주면 우스운 사람으로 본다. 난 뭘 몰랐으니 웃어주었고, 몇 개월이 지난 후 학급 아이들과는 사이가 틀어졌다. 아이들에게 휘둘려 감정이 자주 요동쳤고, 반에는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의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왕따, 학교폭력, 크고 작은 싸움 등 내 능력 밖의 일들이 계속 벌어졌다. 싸움을 해본 적도, 싸움을 말려본 적도 없는 나는 아이들이 치고 박는 현장에 불려 가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는 무능한 내가 한심하고 싫었다. 교사가 되고 보니 영어를 가르치는 것은 20%에 불과했고, 생활지도(담임 업무 모든 것)가 나머지 80%였다. 분명 평생 뭔가를 잘하면서만 살아왔는데 이렇게 내가 못하는 분야 한가운데 서있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자신감이 떨어졌고 내내 무력감에 사로잡혀 살았다.
그해엔 어떤 큰 사건이 있었다. 내가 공격받았다. 우리 반 아이였다. 하지만 학급은 교체되지 않았다. 나는 사건 이후로도 날마다 그 아이 얼굴을 봐야만 했다. 학교를 쉬어도 된다고 조언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사건으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가 생겼다. 집에 돌아오면 벽을 쳤다. 소리를 지르고 다 마신 맥주캔을 던졌다. 몸부림을 치다 베란다 큰 창문을 발로 차 깼다. 피가 났다. 응급실에 갔다. 큰소리를 들을 수 없어 영화를 보다 영화관에서 뛰쳐나왔다. 꽤 오래 영화를 볼 수 없었다. 당시 나는 그것을 공론화하고 싶어 선배교사에게 상의했으나, 그는 교사가 정신과에 다닌다고 하면 어떤 학부모가 좋아하겠느냐며 나를 말렸다. 10년 전은 지금보다도 더 보수적인 시절이었다.
해당 학생은 절차를 거쳐 봉사활동을 했고, 상담교육을 받았다. 부모는 애가 잘못한 것을 학교에서 보듬어줄 생각을 해야지 처벌을 논한다며 내 눈앞에서 화를 냈다. 그리고 몇 달 후 부모의 직장 발령으로 전학을 가버렸다. 어느 누구도 나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극심한 스트레스(정신적 외상)를 경험하고 나서 발생하는 심리적 반응. ‘정신적 외상’이란 충격적이거나 두려운 사건을 당하거나 목격하는 것을 말한다. [출처 :국가건강정보포털 의학정보]
주된 증상 : 충격적인 사건의 재경험과 이와 관련된 상황 및 자극에서 회피하는 행동을 보이는 것
첫 해에 크게 데어 두 번째 해(2009:스물넷)에 나는 약간 방어벽을 친 교사가 되었다. 중1을 맡았고, 동료 교사들과 매우 친밀해져 학교의 힘듦을 조금 잊으며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하면 할수록 교사가 내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영어를 가르치는 것이 약간, 아이들의 생활지도, 갈등 조절, 학교폭력 처리, 싸움 말리기, 학부모 상담 등이 대부분인 이 직업이 내 적성인 것 같진 않았다. 나는 그런 것에 소질이 없었다. 누구에게나 힘든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잘하는 선생님들이 주변에 분명 존재했다. 나도 내가 잘하는 것을 하고 싶었다. 나는 항상 내가 아닌 것처럼 그냥 살아지는 대로 살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직 어렸기에 수능을 다시 볼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대학을 다시 갈 만큼 관심 있는 분야가 없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교사 임 00은 껍데기에 불과했고, 진짜 임 00은 무엇이 되어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었다. 다른 대안을 찾지 못해 계속 현재에 머무르는 날들만 이어졌다. 살아지는 대로 사는 것은 정말 후진 것 같다고 대학 시절부터 수백 번도 넘게 생각했지만 졸업 후에도 그렇게 후지게 살고 있을 줄은 몰랐다. 대학생활이 맘에 들지 않다고 생각했을 때, 그때 마침표를 찍어야 했던 건 아닐까. 마음에 들지 않는 대학생활의 연장선상인 직업에 내가 자발적으로 뛰어들어놓고선 여전히 현실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있는 것이 꼴 사나워 보였다. 내 인생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3년 차(2010:스물다섯)에는 2학년을 맡았다. 그나마 마음에 맞는 아이들을 만났고, 아이들과 같이 꿈을 꾼다는 느낌으로 나도 내 길을 찾기 위해 진로 고민의 끈을 놓지 않았다. 가끔 몇몇 아이들이 ‘선생님은 왜 선생님이 됐어요?’라고 물을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 나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이 된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3년 중에 괜찮은 해였음에도 사건사고가 없진 않았다. 익명의 악성문자를 받고 그 발신자를 찾기 위해 kt 전화국으로 직접 향하는 내 발걸음은 무거웠다. 그리고 그곳에서 알려준 번호가 학급 아이 중 한 명의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리고 그 이후의 일들 .
첫 발령지의 3년에서 깨달은 것은, 내가 언제든지 공격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 직업에는 그런 나를 보호해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거의 없었다. (후에 교권보호대책위원회 같은 것이 생기긴 했지만 그걸 어떻게 여는 것인지 잘 아는 사람도 없었고, 저때는 그것마저 없었다.) 교사는 철저히 약자였다. 사회는 교사가 성자이길 바라는 것 같았다. 용서하고 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 학교와 교사의 역할이라고 했다. 하지만 교사의 인권은?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침해받았을 때는? 내가 특별히 유약하고 다른 선생님들은 모두 강했던 걸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학생과 학부모의 무차별적인 감정 공격에 상처 한번 받아보지 않아 본 선생님들은 아무도 없다. 그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
몇 년 후 노래를 만들어 부르기 시작했을 때, 그 3년의 기억으로 ‘화살’이라는 곡을 썼다. 나는 교사로 일하는 것이 숨을 곳 하나 없는 허허벌판에 방패 막도 없이 덩그러니 서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너무 슬프기에 공연에서는 한 번도 불러본 적이 없다.
화살
나를 향해 날아오는 화살은
어디에서
피하려 해도 가슴에 박혀
상처가 되네
난 누구도 겨누려 하지 않았는데
왜 내게, 왜 내게
내게 소리치지 말아요
나를 향해 겨누지 말아요
난 그저 작을 뿐
막을 수 없어요
나를 해하지는 말아요
나를 좋아하지는 않아도
당신의 화살에
난 일어설 수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