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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 Jul 14. 2021

희미할수록 선명해지는 것

to get better

오늘 새벽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깼다. 움직이지 못하는 나를 위해 남편이 약을 가져다주었다. 눈을 뜨기가 어려워 물을 이불에 쏟길 여러 번, 아껴온 편두통 약을 삼켰다. 이제 3알이 남았을 것이다.


아픈 것이 지긋지긋해 안 아프게 죽는 것이 나의 꿈이지만 두통 공격이 오면 꿈도 희망도 계획 같은 것도 다 사라진다. 그냥 벗어나고 싶다. 그게 안 되면 그냥 이대로 사라지고 싶다. ‘내가 사라졌으면’이라는 노래가 머릿속을 맴돈다. 내가 사라졌으면. 내가, 사라졌으면.


두통은 모든 것을 불능하게 만든다. 외출은 어려워도 집안에서 바쁘게 살아가던 나의 일상도 책을 읽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잠깐의 산책을 하는 것도, 그것이 무엇이든 생각이라는 걸 하는 것도 두통 앞에선 무력하다. 모두 뒤로 밀려나고 만다. 모든 것이 뿌옇고 내가 아프다는 사실만 남는다.


- 요샌 연락 안 와요? 글?


- 요샌 글 안 써요.

길을 잃었어요.


나에게도 까마득해진 그 일을 그가 물었고, 나는 그것이 글의 방향을 다시 설정해야 할 것 같다고, 어떻게 쓸지 모르겠다고 버벅거리며 답했던 것 같다.


내가 왜 글을 안 쓸까.


생각을 하고 틀을 짜고 기둥을 세우고 싶다. 간판을 새로 걸고 싶기도 하다. 책을 읽고 싶다. 그리고 매일 아침 찾아오는 두통에 모든 것은 무너진다. 와르르르.


티브이 화면을 조금씩 밝힐 수 있게 되었다. 일주일에 두 번 재활을 받으러 운전을 해 갈 수 있게 되었다. 가끔 방의 불을 켜기도 한다.


그러면 뭐.

편두통은 내가 나아간 걸음마저 알아볼 수 없게 만든다. 뒤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어딘가로 갈 수 있는 꿈을 꿀 수 없는 건 아닐까 막막해진다.


- 왜 길을 잃었어요?


그의 질문이 귓가에 맴돈다.

내가 길을 잃은 것은 비단 글뿐만이 아니구나. 나는 정말 길을 잃었구나.


돌아오는 신경과 진료일에는 다시 편두통 보톡스를 맞아볼까.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계획과 생각은 그런 것뿐이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재활운동은 빠지지 않는 것. 안간힘을 쓰며 운동을 나가고 남은 편두통약의 개수를 떠올린다.


나아지고 싶다. 나아지고 싶은 마음 하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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