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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 Sep 22. 2021

편두통 발작이 하루에 두 번이라니

나쁜 놈

하루에 편두통 어택이 두 번 오면 사람이 겸허해진다. 조금 덜 아팠던 날들에 사는 재미가 없다며 한숨을 푹푹 쉬던 것을 반성하게 된다. 사는 재미 좀 없으면 어떠랴. 살아 느끼는 고통만 없어도 살만하다.


그놈이 오는 느낌이 들면 천천히 방으로 들어가 조심스럽게 몸을 뉘인다. 턱을 당기고 가슴을 내려 자세를 정렬하고 몸에 힘을 뺀다. 머리가 욱신욱신. 사는 게 재미없다는 생각?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안면이 저리고 턱이 굳는다. 살을 빼야 한다는 생각? 가히 배부른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재활이 너무 오래 걸린다? 문구점 신상을 만들어야 한다? 글을 써야 한다? 난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지? 모두 속세의 사치스러운 잡념이다. 뇌에 전기코드가 꽂힌 채 빙빙 도는 때 그런 것들은 모두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된다.


생각 같은 거 하지 말라고 편두통 놈이 오는 것 같기도 한데 내가 평소에 하는 생각을 적어보니 쓸 데 없는 게 많긴 많은 것 같다. 그런데 누구나 가슴속에 삼천 원쯤은, 아니 저 정도의 생각은 담고 사는 거 아닌가? 내가 정말 생각이 너무 많나?


한 시간쯤 누워 있으면 편두통에서 풀려난다. 그러면 나는 몸을 일으켜 걸어보고 의자에도 앉아본다. 저녁으로 먹을 요거트를 통에서 덜어내고 냉장고를 조심스럽게 닫는다. (머리에  충격이 전달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식탁에 앉아 느리게 요거트를 먹고 티브이를 한 번 켜보고 역시나 빛과 소리를 못 견뎌 바로 꺼버린다. 누워 있는 동안 충전이 다 된 전자책 리더기가 바로 옆에 있지만 오늘의 두 번째 두통은 책을 읽다가 왔기에 참기로 한다.


그리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핸드폰도 안 보고 티브이도 안 보고 움직이는 어떤 것도 보지도 듣지도 않고 그냥 멍하니 있었다. 뭘 집중해서 보면 머리가 아프니 초점 없이 흐린 눈으로 그냥 앞을 바라보았다.


사실은 심심했는데, 놈이 두 번 왔다 가니 심심도 같이 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은 평화다.


진짜 그놈 실체만 있었으면 멱살이라도 잡고 좀 물어보고 싶다. 너 왜 자꾸 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겨울에 와서 봄 여름 다 보내고 가을까지 있는 게 말이 되니? 이 놈아?


뭔가 한 가지를 하면 편두통이 온다. 한 끼 요리를 하는 일, 책을 조금 길게 읽는 일, 아이디어를 정리해보는 일, 다이어리 꾸미기를 하는 일. 편두통이라는 이름의 유리잔은 물이 끝까지 채워져 찰랑거리고 있고 내가 한 방울만 더하면 흘러넘치고 만다.


넘치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 창문으로 살랑거리는 바람이 느껴져 산책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도 또 조심,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종일 노력하는데 겨우 한 방울, 겨우 한 가지의 일로 물이 넘쳐 버리면 맥이 빠진다. 그 한 방울이 된 일들은 다시 하기가 조심스러워진다. 그 일이 문제가 아니라 이미 넘치기 직전인 편두통 유리잔이 문제인 건데 나로선 그저 등을 납작 엎드리고 수비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


오늘 점심에 김치찌개를 끓이고 계란말이를 할까 하는 찰나에 그놈이 스멀스멀 왔다. 안경을 맞추러 외출한 남편에게 김치찌개를 끓였으니 빨리 오라고 전화했는데, 남편이 도착했을 때 나는 침대에 누워 그놈과 싸우고 있었다. 밥을 먹긴 먹었는데 생선 냄새가 비려서 한쪽으로 치워야 했고, 찌개는 내가 끓인 것인데도 조금 힘들었다.


그런 발작을 오늘은 두 번 겪었다. 첫 번째 놈 이후 아주 조금 괜찮을 것 같아서 책을 읽었더니 또 물 잔이 넘쳐버렸다. 역시 괜찮을 것 같을 때 말고 괜찮을 때 해야 한다.


근데 난 뭘 언제 할 수 있지? 편두통 물 잔에 물이 가득 차서 일단 저것부터 비우고 싶은데 그건 어떻게 하는 걸까. 편두통의 원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니 방법은 없다. 그냥 이렇게 자꾸 흘리면 바닥이 나려나? 아님 내가 유리잔을 깨버릴 순 없나?


책을 못 읽고 티브이를 못 봐도 그리 나쁘지 않다. 그건 견딜 수 있다. 그래도 두 번은 아니다. 하루에 편두통 발작 두 번은 정말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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