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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 Jan 19. 2022

상세불명의 가려움증을 두려워합니다

임신은 내가 했던 모든 것 중 가장 멍청하고 가장 현명한 일이었다. 임신으로 내 인생의 편두통이 촉발되었고, 당시 보냈던 암흑 같은 십 여일로 모자라 나는 지금도 편두통의 그늘 아래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오늘 떠오른 또 한 가지의 이유. 임신 때문에 나는 당시 일 년 넘게 나를 괴롭히던 상세불명의 가려움증에서 벗어날 기회를 놓쳤다. 더 정확히는 대학병원에 가서 모든 검사를 끝내고(역시나 어떤 알레르기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결과를 듣고) 비싸고 강력하다는 피부과 약을 가방 한가득 두툼하게 받아 온지 이틀 만에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피를 열 통을 뽑고, 등에 수십 개의 알레르기 물질을 붙이고 별의별 검사를 다했는데, 한 달 치 약 값이 십만 원은 됐는데 그걸 한 알도 먹지 못하게 된 것이다.


내가 갑자기 삼 년 전 임신에 적대감을 분출하는 이유는 그것이 다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통증을 다 통틀어서도 내가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 인간의 존엄성을 해하고 공기마저 두렵게 만들었던 것, 상세불명의 가려움증이다.


이 증상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시간을 많이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벌써 4년 전이 돼 버린 2018년의 어느 날이었고, 통증을 견디다 못한(2018년은 통증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다) 내가 취침 전 약을 한 손 가득 삼켜버린 어리석은 날이었다. 잠에서 깨어나니 알 수 없는 가려움증이 시작되었다. 눈에 나타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곳이 미친 듯이 가렵기만 했다. 공기조차 가려워 어쩔 줄 모르던 그때의 나를 나는 지금도 떠올리고 싶지 않다. 기억나는 건 일주일 내내 항히스타민제 주사를 맞았다는 것, 가려움 때문에 일주일 동안(하루가 아니라) 고작 한 시간밖에 자지 못했다는 것, 그나마 일주일이 지나니 사람처럼은 살 수 있게 됐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피부가 예민한 사람이 되었다. 부드러운 것만 만지고 입는 사람이 되었다. 면 100% 탄탄한 티셔츠 따위는 입을 수 없는 레이온 100% 같은 흐물흐물한 사람이 되었다. 내가 쓸 수 있는 몇 가지 소재를 찾고 나자 사는 게 그리 지옥 같지 만은 않았다. 그리고 임신 전 대학병원에까지 가며 해결하려고 했던 나의 가려움증 문제는 유산 후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냥 내가 구축한 부드러운 세계 속에서 살면 특별히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정도. 그래서 그 이후엔 피부과에 가지 않았다.


몇 번 위기가 찾아올 때가 있었다. 주로 겨울이었는데 건조한 날씨 탓인지 이유 없이 온몸이 미칠 듯이 가려운 날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날들은 그냥 하루나 이틀 정도로 그냥 지나갔다. 그것이 찾아올 땐 만성적이지 않고 일시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크게 불안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제 시작된 가려움증은 조금 다른 것 같다. 2018년 봄의 한가운데 내가 느꼈던 그 느낌인 것 같다. 그때 갔던 동네 피부과를 찾았고, 그때 같지만 그때의 약한 버전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의사는 그때와 비슷한 약을 찾아 처방해주었지만 그가 4월의 약을 찾은 것인지, 아니면 내가 몇 달 후 접촉성 피부염 때문에 병원에 다니던 7월의 약을 찾은 것인지 모르겠다. 긴 외출은 어려우니 빠르게 약을 받았고 집에 와 부드러운 옷으로 갈아입고 가려운 곳에 바디로션을 발라댔다. '오늘 하루일 거야, 오늘 하루로 끝날 거야'라고 나에게 주문을 걸듯 말했지만 가슴속 깊은 곳에선 불안함이 밀려오고 있었다. 또다시 내게 그때와 같은 시련의 시간이 주어지는 건 아닐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기로 했다. 내게 피부 문제가 생기고 해결하려 했던 시간들, 그리고 그 노력이 멈춘 곳. 그곳에서 다시 시작해야 할 터였다. 삼 년 전 내게 많은 약을 안겨줬던 그 대학병원을 다시 찾아가 보기로 했다. 가려움증은 심각한 문제고 난 이 문제와는 더 이상 동침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 어떤 문제가 있어도 이것만은 다시 그때처럼 겪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강했다.


다시 한번 그 대학병원 홈페이지에 접속. 피부과 선택. 그때 그 교수님 그대로 계심. 선택. 오 마이. 가장 빠른 예약이 2월 28일이었다. 이 문제가 2월까지 이어지길 바라지도 않는다. 아니 일주일도 싫어, 근데 2월 마지막 날이라니. 그전에 무조건 낫겠다는 생각으로 예약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시간 후에 노트북 앞으로 다시 돌아와 예약 버튼을 눌렀다.


임신은 내가 했던 모든 것 중 가장 멍청한 일이었다. 편두통이 시작되게 했고 지옥 같은 열흘을 보내게 했기 때문, 그리고 오랫동안 나를 괴롭혀 온 피부 문제를 해결할 기회를 눈앞에서 발로 차게 했기 때문. 하지만 가장 현명한 일이었다. 다시는 그것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경험자의 확신을 갖게 했기 때문에.


가려움증이 내일 아침이면 씻은 듯이 나았으면 좋겠다. 최악의 상태를 다시는 상정해보는 일이 없도록. 집에서 혼자 평화롭게 책을 읽다가 동굴 끝까지 불안해지는 감정을 느끼지 않도록. 지금의 이 증상이 단지 일시적인 것으로 이렇게 지나간다면 나는 당장 2월 28일의 예약을 취소하고 마음 편히 따뜻한 겨울을 즐기며 날마다 바디로션을 더 열심히 바를 것이다. 가습기를 날마다 더 정성스레 닦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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