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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 Nov 03. 2021

무직 이즈 마이 라이프

Mujik is my life

나는 무직이다. 뮤직은 이미 해봤으나 딱히 이름을 알리지 못하고 끝났다. 비싼 장비와 기타를 남겼다. 안정적이어서 남들은 다들 하고 싶어 한다는 교사는 내가 하고 싶지 않아 그만뒀다. 십삼 년이었으니 많이도 버텼다. 집에서 취미로 다꾸를 하다가 문구점을 차려버렸는데 몸 상태가 여의치 않아 무기한 휴업에 들어갔다. 하는 일이 없다. 그야말로 나는 무위도식 그 자체다.


내가 미래에 다시 문구점을 열 수도, 다른 일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나의 몸 회복에만 집중해야 할 때다. 다시 예전만큼 아파지는 것이 진절머리 나게 싫어서 하지 말라는 건 안 하게 된다.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할 수 있을 것 같은 건 포기하게 된다.


책에서 매일 아침 전화영어를 한다는 문보영 시인의 글을 읽었다. 전화영어라. 지금의 내가 그런 걸 한다면 무슨 이야기를 나누게 될지 상상해봤다. 안녕. 나는 한국 사는 물고기야. (무슨 일을 하는지 물어볼 것이다) 나는 지금은 직업이 없어. (주로 뭘 하는지 물어볼 것이다) 나는 약간의 읽기, 쓰기, 쉬기, 식물 가꾸기를 해. 내가 좋은 정원사냐구? 아니 난 아직 1년도 안 됐어. 초보야.


잠시 이런 얘기들을 영어로 하는 상상을 구체적으로 해보았다. 상상만 한 것이 아니라 영어로 중얼거리기도 한 것 같다. (분명히 했을 것이다) 난 그런 걸 좋아한다. 누군가 나에게 질문을 한다 가정하고 내가 대답을 해보는 것. 인터뷰 상황극을 혼자 할 때의 좋은 점은 내가 지금 하고 싶은 이야기를 대답하도록 맞춤형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던지고 내가 받는다.


이런 혼자 놀기의 기술은 언제부터 단련된 것일까. 가장 오래된 기억은 중학교 때다. 나는 언젠가 내가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든 인터뷰이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나의 생각을 궁금해해 주길. 그리고 내가 내 마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길.


노래를 만들어 부르던 시절엔 남들이 내 생각을 궁금해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노랫말로 지어 날려 보낼 수 있었다. 누구에게도 하지 못하는 말을 아무에게나 할 수 있다는 후련함이 있었다. 내가 노래하던 클럽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찬바람이 불지만(특히나 코로나 여파가 심했다) 몇 명이 듣든 일단 내 입 밖으로 나간다는 것이 중요했다. 일단 뱉으면 좋았다. 나는 거의 매번 날아갈 것 같았다.


무위도식하는 삶에는 청자가 없다. 직업이 없어서 대화가 없다는 건 일차원 적인 접근이다. 웃고 떠들고 이야기하려면 SNS든 온라인 모임이든 전화 통화든 할 수 있는 게 널린 세상이지만 나는 그걸 못한다. 지금의 나는 그걸 할 수 없다. 큰 소리를 들으면 머리가 아프다. 말을 많이 하면 턱이 아프고 영상을 보면 머리가 아프고 그럼 또 턱도 아프고 씹기도 힘들고 편두통 발작도 오는 산사태를 견뎌내야 한다. 그래서 덜 보고 덜 듣고 덜 말한다. 모든 걸 덜 한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매일 아침 어플로 타로점을 보면 ‘four of swords - 네 개의 검’이 이상하리만치 자주 나온다. 내 손에 카드가 붙었나? 싶을 정도로 자꾸 보인다. 네 개의 검 카드에서 한 청년은 관짝 위에 죽은 듯 누워 있고 벽에 검 세 개가 걸려 있다. 한 개는 관 옆에 붙어 있다. 어플이 알려주는 점괘를 읽어보면 오늘은 만사 제쳐두고 일단 쉬라고 한다. 관짝 위에 누워 있는 것처럼 쉬라는 의미인가 보다. 카드의 의미를 좀 더 찾아본다. 시간을 들여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를 재충전하는 것. 고독한 경험으로 내적 힘과 자신감을 갖게 되는 것. 고통, 갈등에서 떨어져 스트레스와 불안에서 벗어나는 것. 이거 내가 날마다 하고 있는 일인데? 귀신같다. 이 정도면 FOUR OF SWORDS를 올해의 카드라고 봐도 될 것 같다.


사실 오늘은 치과에 가보고 싶었다. 다른 병원에서 하던 턱관절 치료가 가까운 곳에서도 가능한지 물으려 전화번호를 찾아 메모지에 적었다가 결국 걸지 않았다. 아마도 그냥 오라고 하거나 예약을 하라고 할 텐데 오늘은 나갈 수 없을 것 같았고 내가 괜찮을 날을 예측까지 하는 건 더 어려웠다. 그래서 그만뒀다.


오늘의 나는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고 거실과 방만 맴돌고 있다. 날이 좋아 2번 방은 오랜만에 창문도 열어 식물들에게 바람도 쐬어 주었지만 그 바람을 내가 나가 맞을 엄두는 나지 않았다. 한 발짝 나가면 편두통 발작이 일어날 컨디션이었다.


어제의 재활에서 선생님은 나에게 좀 더 좋아질 때까지 조심하자고 했다. 나는 이미 그러고 있고 그럴 거라고 했다. 아픈 느낌이 뭔지 너무 잘 알아서 다시 느끼는 것이 죽도록 싫기 때문이다. 돌아가는 것만은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오늘은 집안만 맴도는 하루였다. 집안을 맴돌다 편두통 낌새를 알아채곤 민첩하고 조심스럽게 누워 쉬고 치과에 가는 대신 찜질팩을 돌려 턱에 대고 있다가 아 내가 정말 하는 것이 없구나 하고 실감하는 하루였다. 휴업, 이라고 하긴 했지만 지금의 내가 말 그대로 무직이로구나. 하고.


무직도 뮤직도 모두 잊을 필요가 있다. 네 개의 검 카드가 왜 자꾸 나오는지 놀랍지도 않다. 조금 쉬고, 아니 조금 더 많이 쉬고 아무것도 하지 말자. 아무것도 되지 말자. 모든 생각 끝. 이 글도 여기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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