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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표심 Sep 16. 2022

고1, 미팅. 예쁘냐 귀여우냐

세상엔 예쁜 여인과 귀여운 여인이 존재한다

-용돈 좀 주세요

  "아버지, 내일 미팅 가는데, 2천 원만 주세요."

  "뭐라고?"

  고1 저녁 아버지에게 몇 마디 욕을 먹었다. 다음날 미팅은 가야 하니, 욕을 먹어가며 계속 아버지를 설득했다.


  "제가 숨기는 것도 아니잖아요. 친구들하고 건전하게 여학교 학생들 만나는 거라고요. 비밀로 하지 않고 말씀드리는 거니, 돈 좀 주세요."


  떼를 써서 결국 돈은 받아냈지만, 뒤통수는 뜨거웠다. 앞으로 이런 일들은 비밀로 진행해야지.


  다음날 영등포 롯데리아에서 신광여고 4명과 우신고 4명이 만났다. (신광여고는 숙대입구역 근처에 있다.) 키가 좀 큰 듯한 여학생들이었는데, 미팅이 그렇듯 역시나였다. 이야깃거리가 없으니 일단 재미가 없었다.


  이 자리는 우리 반 보이스카웃이었던 홍성명이 주선한 것이었다. 성명이는 180미터 키에 빼빼 말랐지만, 앉아있을 때 무릎 위 넙다리뼈(대퇴골)가 길었다. 키가 크려면 그 뼈가 우선 길어야 하는 거였다.


-퐈이팅~

  성명이는 아침마다 보이스카웃 복장을 하고, 학교 정문 앞에서 교통정리를 했다. 긴 팔다리를 이용해서 흔들흔들 춤을 춰가며 했다. 정문으로  걸어 들어가기 전 그의 현란한 몸동작과 호루라기 소리를 조금 감상하다가 한마디 했다.


  "성명아, 퐈이팅~~"


  이 녀석은 자주 웃고 농담과 장난이 심했지만, 그 웃음은 슬픔 위에 돋아난 연약한 풀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의 집은 학교 근처에 있어, 방과 후에는 애들과 가끔씩 같이 놀러 갔다. 성명이 형은 동경대 수학 문제나 영어로 된 수학 문제를 풀고 있을 때가 있었고, 중3인 사촌 여동생이 성숙한 얼굴로, 자주 웃는 얼굴을 우리에게 내 비쳤다. 그 여동생의 엄마는 수녀였다고 하니 신비감이 서려있는 집으로 느껴졌다.


-토끼눈

  얼마 후 오류역장 아들인 주엽이는 성명이 소개로 진명 여고생과 일대일 소개팅을 했고, 일이 잘 풀려 그 여학생을 몇 번 더 만나고 있었다. 진명여고 전교 2등이라는데, 그녀는 우리 앞에 나타날 때는 마스크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토끼눈처럼 동그랬다. 쌍꺼풀이 있는 그녀의 눈은 며칠 앓다가 이제 생기를 되찾은 듯 가냘파 보였고, 맑고 촉촉한 눈은 보호본능을 자극했다. 우리보다 약간 작은 키였는데, 귀여웠다. 그 애를 보고 예쁜 것과 귀여운 것은 또 다른 차원이라는 것을 알았다.


  일단, 주엽이가 부러웠고, 그녀가 내 여자 친구였으면 했지만, 그녀는 내게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럼 차선책을 선택하는 수밖에.


  "주엽아, 여자 친구에게 말해서 여학생 좀 소개해 줄래?"

  "알았어. 기다려봐. 얘기해 볼게."


-그렇죠 뭐

  고1 겨울방학이 되고, 주엽이 여자 친구가 진명여고 여학생을 소개해줬다. 전교 1등이라고 했다. 물론 나는 전교 1등에는 관심이 없었다. 다만, 귀여우냐가 문제였다.


  만나는 날, 나는 감청색 재킷과 회색 바지를 다려 입고 나갔다. 교복자율화로 바뀐 교복이었다. 우린 종로 롯데리아에서 만났다. 진명여고가 지금은 양천구 목동에 있지만, 당시엔 종로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어떻게 된 거야? 주엽이 귀여운 여자 친구의 친구 아니야? 뭐 이리 달라. 귀여움은 어디로 간 거야? 귀엽거나 예쁜 애들은, 왜, 귀엽거나 예쁜 애들과 친구 하지 않는 것일까? 도대체 왜?


  "학교생활 재미있어요?" 여자애가 물었다.

  "그렇죠. 뭐~" 내가 답했다.

  "선생님들은 재미있어요?" 그녀가 물었다.

  "그렇죠. 뭐~" 나는 할 말이 딱히 없었다.


-짜장면

  귀여워야 하는 내 스타일이 아니니, 부담은 없었지만, 처음 본 여학생과 단둘이 대화를 이어가기는 힘들었다. 호구조사가 끝나 할 말이 없어, 나는 선생님이 힘들게 한 얘기 몇 마디를 했다. 웃을 일도 없었고, 그냥 어색했다.


  함께 점심을 먹으려는데, 근처에 중국집만 보였다. 어쩔 수 없이 서로 짜장면을 시켰다. 여학생과 첫 미팅 때는 짜장면을 먹지 말라는 지침을 책을 통해 알고는 있었지만, 왜 그렇게 쓰여있었는지 그때의 실전을 통해 깨달았다.


  이제 헤어져야 하는데, 다음을 어떻게 할지 고민스러웠다. 다른 귀여운 여인을 찾아 나서야 하는데, 이 애가 실망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스러웠다. 짜장면도 먹지 말고 롯데리아에서 바로 헤어졌어야 하나?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는 않았는데, 마음 상할 것 같아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래, 예의상 한 번 더 만나주자.

  "저,,,1주일 후에 여기서 한 번 볼까요?"


-친구 소식

  하기 싫은 말을 억지로 할려니 가슴이 답답했다. 어떻게 또 만나나. 만나서 또 무슨 말을 하나. 이러다 내가 정말 자기를 좋아하는 줄 알면 어떡하지. 고민은 깊어갔다.


  1주일 후 만남은 있었지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는 것은 별로 없다.

  "또 연락드릴게요."

  나는 이 말만 하고 빠져나왔다.


  그리고 주엽이에게 말했다.

  "주엽아, 네 여자 친구에게 말 좀 전해줘. 나. 공부땜에 그 여자애 못 만난다고."

  이렇게 그 애와는 끝이었지만, 주엽이에게 다시 확인했다.

  "주엽아, 그 애 아무렇지도 않은 거지?"  


쉽게 생각하고 사람을 만나지만, 그 인연을 마무리하는 것에는 훨씬 많은 에너지가 든다. 상대방을 실망시키고 힘들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성명이 소식을 한 번 들었다.


  집 근처 철도에 누워 생을 마감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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