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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표심 Oct 19. 2022

크리스마스 선물, 여자의  한 마디

크리스마스 선물

-총 선물


  "와~ 엄마, 산타할아버지가 총을 놓고 갔어"


  5살 때는 산타 할아버지가 권총보다 조금 큰 장난감 총을 놓고 갔었다.


  총 윗부분은 나무 재질이었고 빨간 칠이 돼 있었다. 손잡이를 뒤로 당겨 발사준비를 하고, 총구에 총알 대신 몽당연필을 넣어 쏘았다. 못 쓰는 종이 몇 장을 겹쳐서 몇 장이나 뚫리는지 실험도 했다.


  어려서 남자아이에 가장 큰 선물로 총만 한 것이 있을까. 5살 때 산타 할아버지는 어린 남자애 마음을 너무도 잘 알았다.


  한 살을 더 먹어, 71년이 됐다. 8월엔 실미도 사건으로 가족 모두가 슬픔에 싸여있었지만, 크리스마스는 또 왔다.  

( 브런치 글 '6살.[실미도 사건] 나는 지옥을 보았다' 참조 )


  나는 마냥 꿈에 부풀었다. 잠자고 나면, 작년 크리스마스보다 더 성능 좋은 총 선물이 머리맡에 있지 않을까. 스프링 성능이 더 좋은 총을 쏘며 노는 나를 상상하며 누웠다.


  이 번엔 자지 말아야지. 하얀 테두리의 빨간 모자 산타할아버지를 만나봐야지. 자는 척만 하고 정신 차려야지. 가물.



-잠결에 듣는 새벽송


  아차, 새벽 노랫소리에 잠을 깼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 하늘의 소리처럼 신비하게 들렸다.


  잠결에 듣는 고요한 밤 노래는 아련했다. 5살 때도 들었던 크리스마스 새벽송 캐롤 소리. 완전히 깨어나지 않아 여기가 어딘지 분간이 안 가는데, 아득아득하게 들리는 노래는 천사들의 소리 같았다.


  저 멀리서 보이지 않게 다가오다가 점점 또렷해지는 신비한 노래였다.


  엄마는 문을 열고, 새벽송 온 사람들에게 뭔가를 전해 주었다. 잠에서 깬 나는 머리맡을 확인했다. 역시나 선물이. 벌써 산타할아버지는 다녀간 거네. 이 번에도 또 놓쳤구나. 선물은 밝은 아침에 풀어보기로 하고, 다시 잤다.


   빨간 장화 모양의 '장다리 선물세트'였다. 우산 같은 손잡이가 있고, 속엔 과자가 들어있었다. 이게 뭐야. 이게 아닌데. 이거 선물이 바뀐 것 같아요. 산타할아버지를 어디서 찾나.


  나는 붉으락푸르락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뭘 선물 받고 싶다고 말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산타할아버지에게 내 뜻을 전하지? 엄마에게 말하면 되나? 엄마, 아빠가 혹시 산타할아버지는 아닐까 했지만 증거가 없으니.



-대연각 화재


  이날 시민아파트 할아버지 댁에서 놀고 있는데, TV에 대연각 화재 사건이 보도되고 있었다.


  사람들이 연기 나는 고층에서 떨어지는 것이 화면에 나왔다. 추락사 38명에 총 166명이나 죽었다. 이 사건은 25일 크리스마스 아침에 발생해 18시간 만에 진화됐다.


  사람들이 저렇게 처참하게 죽는데, 내 선물이 이게 뭐냐고 칭얼거리기 어려웠다.


  국민학교 까지 나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에게서 선물을 받았다. 산타클로스의 존재에 대해선 의심할 수가 없었다. 중학교 저학년 때까지도 믿었다.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선물을 통해 그를 경험한 거였으니.


  내겐 성경도 마찬가지였다. 성경 기록은 무오한 역사적 사실이라 믿었다. 의심하는 사람들이 의심스러웠다. 산타도, 예수도, 성령도, 천지창조도 모두 믿어지는 것은 성령의 작용이라고 생각했다.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믿음. 맹목적 믿음. 이 건 나를 타인에 대한 몰이해와 비공감으로 몰아갔다. 비극의 출발이었다.


  중3 때는, 나도 대림동 양문교회에서 새벽송을 돌았다. 여름수련회 연극, 문학의 밤 등을 거친 관성  때문이었다. 이지연이 혹시나 나타나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지만 그런 기적은 없었다.



-새벽송을 직접 돌다가


  겨울 새벽에 밖을 돌아다니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껴입었어도 얼굴과 목, 손과 발은 시렸다. 장갑 낀 손끝은 통증을 느꼈고, 습기 찬 발은 피가 잘 돌지 않았다.


  신림중 1학년 겨울 학교가 너무 추워서 발에 동상이 걸리기도 했으니, 발이 제일 신경 쓰였다. 서 있을 때면 피부에 살얼음이라도 낄까 봐, 발가락을 꼼지락꼼지락 했다.


  새벽송 대열은 현재의 2호선 구로디지털단지역 근처를 지나고 있었다. 배가 차가워서였을까, 저녁 먹은 것이 어떻게 됐는지, 아랫배 아픈 것이 심해졌다. 우리가 가는 길 오른쪽에선 검은 도림천이 흐르고 있었다.


  일행을 먼저 보낸 후, 경사진 아래로 내려가 이를 악물고 허리띠를 풀었다. 하늘에 급전을 쳤다.


  "하나님~ 조금만요. 조금만요. 안돼요."
  "잠시만요."
  "이 세상을 다 드릴 테니. 배도 너무 아파요."


  허리띠를 끄르는 시간은 너무도 길었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체중을 번갈아 실으면서 몸을 기우뚱기우뚱. 아악..



-새벽송의 선물은 어디로


  겨우 타이밍을 맞췄다. 눈에선 눈물이 나왔다. 휴지는 어떻게 마련했는지.


  다음 집은 반 집사님 댁 오래된 아파트였다.


  저어~들~밖에 하안~바암 중에...

  노오엘~ 노오엘~ ♬


 나는 화음도 넣었다. 그러면 잠결에 천사들의 노래로 듣는 사람들이 있겠지. 잠을 자고 있는 꼬마의 귀에 신비한 노래를 들려줘야지.


  중간에 반 집사님이 포장된 선물을 들고 나와, 같이 노래를 불렀다. 과자 선물세트였다. 이렇게 여러 집을 돌다 보니, 각자 선물을 한 두개씩 들게 되었다. 교회에 돌아와선 간단한 게임을 하면서, 그 선물 과자를 먹었다.


  이로써 새벽송의 앞뒤 과정을 알게 되었다. 더 어릴 적 새벽송 팀에 엄마가 준 선물의 목적지가  어떻게  되는지.


  내 인생 마지막 새벽송은 두 번째 학력고사를 치른 후였다. 첫 해는 이과에서 문과로 바뀐 K대 통계학과에 넣었다가 낙방했다. 고3 때 교회에 발길을 끊어서 떨어졌나?



-탐욕을 묻히지 않겠다


  고3  당시 다니던 교회 담임목사는 예배 후 노인들은 제쳐두고, 부자들과 악수하려 했다. 탐욕의 손이 내게 닿을까 봐, 나는  다른 길을 택했다. 교회를 나올 때, 계단을 통해 다른 문으로 나갔다. 그러다 발길을 끊었다.


  그 후 우리 아버지가 교회 대학부 부장이 됐기 때문에, 억지로 교회에 몇 번 나가 주다가 크리스마스를 맞이했다.


  당시 대학부 학생들이 다녔던  학교는 이대, 서울대, 서강대, 인천간호전문대, 피어선대, 인천대, 중앙대 등이었다.


  크리스마스 전부터 대학생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고, 성탄절 새벽송도 참가했다. 새벽은 역시 추웠다. 나처럼 재수생이었던 예쁜 현지는 이미 현보형과 같이 다니고 있었다. 매력적이긴 한데, 약하고 철이 없어 새벽송 내내 칭얼거렸다. 나는 포기.


  뒤풀이로 조 장로님 댁에 모여 게임을 했다. 공공칠빵. 캡틴큐 등 놀이를 했다. 이렇게 학생들 얼굴과 이름을 익혔다. 끝나고 나오면서 동갑내기 혜은이와 잠시 얘기를 했다.



-여자의 한마디가 향방을 결정한다


  혜은이와 몇 마디 한 크리스마스 아침까지, 나는 대학교와 학과를 아직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학교에 다시 지원해야 했지만 나는 많은 신경은 쓰지 않고 있었다. 아버지가 혼자 자료 분석을 끝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Y대 경영학과나 영문과에 지원하라고 했지만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날 중국 요릿집 딸이었던 혜은이는 내게 조금 높은 톤으로 말했다.

  "내가 미팅을 했거든. 근데 그 애가 한 손에 경제학 책을 들고 있잖아"

  "그래?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아니, 나는 경제학 책을 든 그애가 정말 멋있더라~"


  오호. 그래? 그럼 나는 경제학과.


  그날 나는 아버지에게 학과를 정했다고 말했다. 경영학과 같은 것은 격이 떨어진다고 경제학과를 가겠다고 우겼다. '경제학이 경영학보다 학문 같다'라고 말하면서.


  Y 대는 혹시 모르니, 안전하게 s대 경제학과. s대 경영학과는 큰 이모 둘째 형이 나왔으니. 이렇게 합리화했다.


  여자의 말 중에

  가장 힘센 말.


  나는 이런 남자가 멋있더라.


  귀가 쫑긋. 고뤠?



< 참고자료 >

-대연각호텔 화재, 나무위키, 2022-10-18

-대연각호텔 화재사고, 국가기록원


< Hark! The Herald Angels Sing >


 샬롯 처치의 노래

 < Hark! The Herald Angels Sing >


< O Come, All Ye Faithfu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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