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엔 영화 시작 첫 3분 안에 관객을 사로잡아야 하는 할리우드 영화의 특징이 그대로 담겼다.
1990년 극장에서 이 영화를 함께본 여자가 누구였는지 기억이 안 난다. 아내에게 7월 4일생을 본 적이 있느냐, 누구랑 봤냐고 조심스레 물어봤다. 다행히 아내다. 휴우~
영화관을
뒤 흔들었던 헬기 소리.
내 머릿속 공포 스위치가 켜졌고,
아들을 잃고 미쳐 날뛰는
하늘이 무너져 땅을 뒹구는
처절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1971년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한강철교 바로 옆 서부이촌동 시민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나는 6살이었다. 8월 23일 그날 온 나라가 공포로 떨었다.
사람들은 무장공비가 대방동 유한양행까지 침입해 왔다고 수군거렸다. 한강 다리만 넘으면, 서부이촌동 우리가 사는 곳인데, 나도 걱정이 되었다.
3년 넘게 북파공작원 훈련을 받던 특수부대원들이,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진입한 '실미도 사건'이 터졌다.
-울음바다생지옥
얼마 후 외할머니 엄마와 함께 넓은 군부대 연병장 같은 곳으로 갔다. 하얀 천이 덮인 관들이 줄지어 있었다.
사람들은 울고불고 소리를 질러댔다. 땅바닥을 손바닥으로 치고, 하얀 천을 들어보고는 소리치며 뒹굴었다. 아들 이름들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철퍼덕 앉아 마구 발을 땅에 비비고 긁힌 피부에서 나온 피가 땅에 묻었다. 몸을 좌우로 앞뒤로 마구 흔들었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하늘을 쳐다봤다.
생지옥이었다.
잠시 후낮게 착륙하는 헬기 소리가 내 몸을 진동시켰다.
트드트드 드득~ 트드트드 드득~
이 헬기 소리는 미쳐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헬기 소리는 죽음, 통곡, 공포였고, 지옥에 끌려온 자들의 고통과 신음이었다.
실미도 사건 때, 내가 가장 좋아하던 둘째 외삼촌이 기간병으로 돌아가셨다.
공군이었던 외삼촌은 휴가 때 잘 다려진 멋진 공군 제복 반팔을 입고 있었다. 아이스크림도 사주었다. 깨끗하고 잘생긴 외삼촌이 멋진 공군이란 사실이, 내겐 큰 자랑이었다.
-영화 실미도 박 병장
외삼촌은 제대를 몇 달 앞두고 있었다. 외삼촌은 우리 아버지에게 실미도로 배치를 받았다면서, 부대 복귀가 무섭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차라리 탈영병이 되었다면 살았을 텐데, 끝내 부모의 가슴에 못을 박고야 말았다.
실미도 사건이 영화로 나왔을 때, 외가댁 가족들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에게 알리지 않았다.
외삼촌은 영화 <실미도>에서 박 병장으로 나왔다.
실미도 시나리오를 구해서 대사를 따라가 보았다.
-훈련병3 : (인찬을 잡고) "나 바꿔줘유 난...통신 막사는 못 해유. 우리 박병장 일주일 있다가 제대 휴가 간다구 엄청 좋아했는디"
-훈련병4 : (벌컥 화내며) "너만 싹통 있는 것처럼 굴지 말어! 여기서 자기 담당 모가지 딸 수 있는 놈이 몇이나 되겄냐! "
-훈련병3 : "너는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새끼니까 정두 없을 거 아냐!"
-헬기 소리는 트라우마
동작동 국립묘지에 나도 따라갔다. 총을 들고 소리 지르는 군인 동상이 보였다. 녹색 잔디는 낮게 깎여 있었다. 제복을 입은 의장대는 하늘을 향해 공포탄을 몇 차례 쏘았다. 흰색 보자기에 싸인 작은 상자를 묻었다.
외삼촌은 2계급 특진했는지, 참배하러 갈 때 보았던 비석에 박OO중사로 돼 있었다.
외삼촌이 돌아가셨을 때,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도 그런 상황이 이해가 안되는 것처럼 보였다.
" 왜 예수 믿는 집에 이런 일이 생겼는지 이해가 안된다"
특히 예수 잘 믿는 장로 가정에 이런 비극이 일어나니, 하나님 영광을 가리는 것이라는 2차 고통이 따라왔다.
예수 믿으면, 영혼과 육체가잘되고 범사에 잘된다며 전도했을 시절이었기에 더욱 이해가 안되었던 것 같다. 나는 6살이었지만, 외가댁 어른들이 하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들었고, 그들의 언어 속 고통을 기억했다.
어른들은 살아난 군인 얘기도 했다.
"화장실 똥 투간 아래에 숨었던 사람은 살았다더라"
나는 군인 가서 위험에 처하면 화장실 밑으로 숨어야지. 근데 얼굴을 분뇨에 파묻고 숨을 참는 모습은 끔찍해~
당시 실미도 화장실 바닥은 무릎까지만 분뇨가 차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돌아가신 외삼촌은 부모의 가슴을 아프게 했지만, 가장 커다란 효도를 했다. 나라에서 꼬박꼬박 유족연금을 보내주었기 때문이다. 그 돈으로 외할머니 돌아가실 때까지 요양병원에 계실 수 있었으니, 외삼촌은 최고의 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