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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표심 Oct 20. 2022

2학년, 세수하자

오란씨

-무슨 노래 불러줄까.


  "형, 기타로 노래 불러 봐"

  "무슨 노래 불러줄까?"

  "먼저, 오란씨~"


  국민학교 2학년 큰 이모 댁에 갔다. 저녁을 먹은 후 큰형 방에 갔다. 식전에 이모가 얼굴을 씻겨주었기 때문에 애들 코에서 윤이 났다. 나는 형에게 기타를 쳐달라고 했다.


  "하늘에서 별을 따다

   하늘에서 달을 따다

   두 손에 담아드려요.

   아름다운 날들이여

   사랑스러운 눈동자여

   오, 오, 오, 오~ 오란씨 ♬ "


  형은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TV에서 듣던 CM 송을 지금 여기서 듣다니. 생음악 무대가 눈앞에서 펼쳐지니 신기할 뿐. 오른 손가락은 6개의 기타 줄을 따라 오르내리고, 왼손가락은 이리저리 모양을 바꾸었다. 띵~ 쇠줄을 튕기는 첫소리는 잔향을 만들며 울림통을 돌아 나오고, 노래는 잔잔히 웃음 속에서 흘러나왔다.


  큰 형방 벽에는 검은색 성구 패넌트가 걸려있었다. 성경 고린도전서 13장이 적혀있었다. 내 얼굴이 달아올랐다. 사랑이라는 글자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1학년 때 짝사랑 한혜진 얼굴이 떠올랐다. 얼마 전 등대지기 노래를 불러준 효숙이도 생각났다. 들키지 말아야 할 생각들이었다.


-이모가 내 얼굴을 씻겼다


  큰 이모 댁에 가는 날은 언제나 기다려졌다. 그 집은 친척집 중 가장 컸다. 큰 이모부는 조흥은행 지점장이었고, 내게 말할 때는 다정한 말투로 하셨다. 물음은 자주 '~냐?'로 끝났다.


  그날은 외삼촌댁 애들과 우리 집 애들이 큰 이모 댁에 함께 따라갔다. 경미 이모도 같이 갔다. 저녁이 준비되는 동안 이모는 조카들 얼굴을 씻겨 주었다. 수건 하나는 무릎 위에 얹고 한 명씩 불러서 얼굴을 씻겼다.


  나는 욕실 밖에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이모가 더 어린 조카 얼굴 닦는 것을 보았다. 이모는 왜 저럴까. 나도 스스로 닦을 수 있는데.


  이모는 내 목에 하얀 수건을 둘렀다. 찜통에서 노란 플라스틱 바가지로 물을 떠 욕실 바닥 세숫대야에 부었다. 이모 손에 물을 묻혔다. 손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눈을 감았고, 이모 손이 물과 함께 얼굴에 미끄러졌다. 손이 얼굴을 흔들어대면, 고개에 힘을 주고 버텼다. 코 한쪽을 막고 흥~ 다른 쪽을 막고 흥~. 코를 비틀어 짜냈다.


  소강상태가 돼 눈을 떠 보니, 이모 손에 비누를 묻히고 있었다. 이모는 미끄러운 손으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나 혼자서는 비누질을 안 했는데. 눈 코가 매웠지만 참았다.  



-이모의 사랑 전달법


  나 혼자 초치기로 씻을 때와는 달랐다. 이모는 얼굴에서 뽀득 소리가 날 때까지 문질렀다. 얼얼했다. 몇 주 동안의 때 꼬장 물이 빠졌다.


  혼자 세수할 때는 내 손이 닿는지 생각하지 않았는데, 미끄러운 이모 손이 느껴졌다.


  나 혼자서 목을 씻으면 언제나 옷깃이 흠뻑 젖었었다. 세수하고 나면 뒷 목이 차가워 목을 빼고 다녔다. 차가운 느낌이 싫어 목은 닦는 시늉만 하거나 잘 안 닦았다. 이모가 닦을 때는 달랐다. 목에 수건을 둘렀으니 젖을 일이 없었다. 목도 시원했다.


  애기 때 엄마가 얼굴을 씻겨 주기도 했겠지만 그 건 기억이 나질 않는다.


  큰 이모 댁에서의 하룻밤. 그날 경미 이모의 사랑이 내 몸에 스며들었다. 그 이모는 외할머니의 딸 중 다섯 번째였다.




< 1970년대 오란씨 cm송 >

1970년대 오란씨 cm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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