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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표심 Sep 19. 2022

고2, 뭘 알아야지, 100대 맞고 나가

비취(beach) 색 - 웃으면 복이와요

-비취색 알아?

  "빙신들, 뭘 알아야지"

  tv에 소개된 당시 유명한 학원 강사가 하던 말이었다.


  나는 그 빙신들에 속했다. 고등학교 2학년 국어책을 읽기는 했지만, 알지 못하니 이해도는 낮았다.


  "송자(宋瓷)에서 고려의 비취색(翡翠色)이 나오고, 고전 금석문에서 추사체가 탄생한 것이 우연이 아니다. 귤(橘)이 회수(淮水)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고2 국어 교과서 <마고자> -윤오영-


  "비취색이라. 해변을 뜻하는 beach색인가? 그렇다면, 모래사장 색? 모래사장 앞에 있는 바다색? 도대체 비취색이 뭐야?"


  비취(beach)색을 모른다고 선생님에게 질문하면, 우리 반 담임이면서 국어 선생님이 뭐라 하실까? 담임선생님은 가만히 있는 나를 비꼬며, 내게 가끔 뭐라 했다. 또 내가 밴드부원이라는 사실이 싫다고 암시하곤 했다.


-퉤, 100대 맞고 나가

  "야~밴드부. 너도 공부란 걸 하냐?" 담임선생님은 가끔 내 뒤통수를 살짝 치며 말했다.


  내가 밴드부에 들어가고 싶어서 간 것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1학년 특활반을 정할 때, 일본어반 지원자가 넘쳐 가위바위보에서 진 것 때문에 어떻게 흘러들어 간 거였다. 그래 노래나 하자하며 합창반에 들어갔다가 그만.  합창반에서 밴드부에 들면 장학금을 받고, 악기도 배울 수 있다는 음악 선생님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 고등학교 험난한 여정의 출발점이 되었다.


  연기 나는 담배를 꼬나물고, 검은 교복을 풀어헤친 밴드부 선배의 말 한마디.

  "여기서 나가려면 100대 맞고 가라"


  그는 밴드부실 바닥에, 목구멍 저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가래침을 퉤~ 뱉었다. 나는 살 떨리는 협박에 두 손들어 버렸고, 내 손과 발에는 공포의 수갑과 족쇄가 채워졌다. 두려움 속에 하는 수없이 개 끌려 다니 듯한 고등학교의 고통이 시작된 건데, 담임선생님은 내가 그냥 불량품이라 생각했다.


  현재 K대 비교문학 국문과 교수인 귀성이가 내 짝이었고, 아이큐 검사에서 그는 128, 나는 126이 나왔었다. 둘 다 보통 수준의 인간이었지만, 담임선생님의 비웃는 입가는 자주 나만을 겨눴다.


  양옆을 누른 서양형 얼굴에 윤수일 코를 한 담임선생님은 나를 볼 때마다, '밴드부가 무슨 공부를 다하네?' 하면서 뼈 있는 말을 했고, 나는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그런 선생님에게 비취색을 물어보면, 좋은 소리나 들었을까? 색깔은 눈으로 직접 봐야 알 수 있지 않을까? 앓느니 죽지.


  무지를 참았고, 어떻게 해결할지 몰랐다. 속앓이는 쭉 이어졌고, 대학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대학교 수업도, 홀로 이 책 저 책 기웃하고 나서야 겨우 내용을 따라갔다. 수업의 이해도는 60% 미만이니 자존감은 땅 속에 대가리를 박고 있었다. 어쩌다 2학점짜리 교양과목 <보건학>에서 A+ 학점을 받아, 차마 죽을 생각은 못했다.


-60프로 이하

  한 달 전 고대 기계공학과 4학년인 조카에게 물었다.

  "학교 강의 들으면, 몇 퍼센트나 이해를 하니?

  "60% 미만이고요, 가끔 40% 이하로 떨어질 때도 있어요."

  "고뤠?"

  나는 그때 죽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겼다.


    능글능글한 교수가 가르치는 철학 중간고사 성적은 F학점이었다. 음흉한 목소리로 농담을 섞어가는 교수가 마음에 들지 않아 철학 과목은 제쳐놓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보이는 사물이 정말 그 사물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나요? 그렇게 실체를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뭔 소리래? 그  교수는 당시 내가 가지고 있었던, 열렬한 기독교 체험 신앙을 무시하는 발언을 중간중간 첨가했다. 자존심이 상했다. 그 교수의 허튼 말들은 내 존재의 기반이 무너뜨리려는 악마의 소리로 들렸다. 그래서 그를 미워했다.


-웃으면 복이와요

  국민학교 때는 말들을 추측만 할 뿐, 명확하게 아는 말들은 적었다. 친구 집에서 보았던 <학습대백과사전>이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우리 집엔 우리 아버지가 마련한 역사, 정치 분야 백과사전 2권이 참고서적으로 전부였다. 책 팔러 온 사람 불쌍해서 사긴 샀는데, 돈이 모자라 일부만 사놓은 것이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본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고, 주변에 도서관도 없었다.


  글자를 알기 시작하면서는 다행히 TV가 말뜻 공부에 자극제가 되기도 했다.


  "뚜루. 루뚜루루 / 뚜루. 루뚜루루

   루빠, 루뚜와♬"


  1973년 국민학교 1학년, 일요일 8시 15분 mbc TV '웃으면 복이와요'가 방영되면 tv앞에 앉았다. 구봉서, 배삼용, 이기동, 권귀옥, 박시명, 서영춘, 임희춘, 신소걸 등이 나와 여러 제목의 콩트를 선보였다.


-모르면 바로 물었었지

  그 해 웃으면 복이와요 코너에는 다음과 같은 콩트 이름들이 붙어있었다.


  애인의 선물, 연기, 부엌칼, 공모자, 욕심, 흉내, 귀뚜라미 소리, 상봉, 판자집, 고발정신, 새 상품, 어떤 도서관, 청탁, 단벌유감, 불벼락, 동문서답, 기사정신, 연행, 어떤 노래자랑, 재수 없는 날.


  라디오, 악취미, 짜장면값, 가방 도둑, 오해, 인플레, 엿치기, 바가지, 며느리, 석유파동, 포졸과 도둑, 유언장, 엽총, 호기심, 진실한 벗, 양품점, 무식한 부부, 사열, 연하장, 산타클로스, 전화 참견, 계급, 유언, 다방, 전화...


  "아빠, 공모자가 뭐예요?

  "아빠, 상봉이 뭐예요?

  "아빠, 청탁이 뭐예요?

  "아빠, 석유파동이 뭐예요?

  "아빠, 허세가 뭐예요?   


  읽을 수는 있었지만, 무슨 뜻인지 모르는 말들이 많았다. 다리를 뻗고 앉아 tv를 보면서, 아버지에게 묻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물으면 아버지는 대답을 해 주었고, 3학년이 돼 가면서, 묻는 횟수는 점차 줄어들었다. 그렇지만, 물어서 확인하지 않은 말들은 쉬운 말도 오래도록 몰랐다.


  산새는 산에 사는 새.

  산나물은 산에서 채취한 나물.

  산낙지는 산에서 사는 낙지.

  "산낙지는 산에 사는 낙지 맞을 거야"


  관악산의 계곡물에는 송사리도 살고, 큰 돌 밑에는 가재도 살고 있지. 민물생선도 있고, 바다 생선도 있잖아. 낙지도 바다에 사는 게 있고, 산 계곡물에서 사는 것도 있을 거야. 그런 걸 산낙지라고 하는 거 아니겠어?


  길거리 간판에 쓰인 산낙지는 '山낙지'라고 생각했다. tv에서나 보았던 냉면은 고3 때 처음을 먹어보았고, 산낙지가 바다 낙지라는 것은 20대에 알았다.


-옹알이하는 삶

  국민학교 1학년, 빨간 글씨들과 들리던 말들.

  화기엄금. 불나면 몸을 낮춰 엄금엄금 기어가고.

  공중도덕. 홍길동처럼 지붕 밟고 공중을 뛰어다니는 도둑놈.

  몇 년 전에는...


   "네이년이 그러던데, 거기 미분양이 많다네요"

  "아~네. 근데, 네이년이란 누구를 말씀하시는 거죠?"

 ( 네이버의 남성명사는 네이놈. 여성명사는 네이년으로 추측된다 )


  최신 조어들은 모를 수 있다지만, 다른 것들은 내가 정말 알고 있는 걸까?


  사랑.

  개념계단 최상급에 위치한 사랑. 이 사랑을 죽을 때까지 알 수는 있을까.


  수십 년 옹알이하고, 말을 흉내 내면서 살아왔지. 말속에는 색깔, 소리, 온도, 촉감, 감정, 살과 피, 밥, 정신, 마음, 영혼, 신, 귀신, 구원, 천국, 지옥, 미움, 사랑 등 모든 게 담겨있는 거 같은데.


  나 자신에게 한 번 물어본다.

  

  "사랑이 뭐야?"

  "어? 그건. 글쎄. 음. 뭐. 아마~"




https://youtu.be/9NAP1OFKI6c

웃으면 복이와요 (오프닝 영상/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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