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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표심 Dec 22. 2022

글을 쓴다는 것은, 수다 떨기

쓰는 순간 진실하다

1. 글 쓰면 다야?


  "왜 카톡으로 글을 보내요. 그 친구들이 보내달라고 했어요?"

  "아니, 그냥 내가 쓴 글이니 읽어 보라고 한 건데"

  "그거 공해인 줄 몰라요?"

  "아냐, 아무도 뭐라 안 하는데"


  1년 전. 나는 카톡에 글을 써서 몇몇 지인에게 배포하고 있었다. 아내는 그런 내 글쓰기에 빨간 색안경을 끼고 바라봤다. 글을 써서 왜 원치 않을지도 모를 사람들을 괴롭히느냐고 했다. 공해라고 했다.


  아내는, 글 쓰면서도 정작 작가 자신은 글처럼 살지 못하는 현실도 아쉬워했다. 그래서 소설가 이외수의 흔들리는 부부관계도 탐탁지 않게 보아왔다.


  이외수가 병이 깊어 죽음을 넘나들자, 그의 아내가 곁에 다시 돌아왔다고 내가 말했다. 아내는, 이외수 아내가 돌아온 것은 '의리적 차원이고, 후회를 덜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작가 자신의 글처럼 살지 못할 거면, 처음부터 글을 쓰지 말라는 뜻을 내게 내비쳤다.


  나는 글 쓰는 이들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똑같은 사람들이고, 단지 말대신 글로 표현한 것뿐이라고 했다. 『대통령의 글쓰기』로 유명해진, 작가 강원국의 책 『나는 말하듯이 쓴다』란 제목처럼 글은 말에 불과할 수도 있다.


  나는 아내에게,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좀 길게 내 생각을 쏘아붙였다. 아내는 듣기만 했다.



2. 작가와 글은 각자의 길을 간다


  글 쓰는 이는 글을 써서, 자신의 생각을 출산한다. 태어난 자식은 새로운 인격을 부여받아, 나름대로 살아간다. 작가는 자신의 삶을 살고, 태어난 글은 독자에게 흡수되면서 다른 삶을 산다.


  작가와 그 저술은 분리해서 봐야 한다. 아버지와 아들처럼 각자의 삶이 있다. 부자(父子)는 비슷한 삶을 살 수도 있고, 서로 다른 삶을 살기도 한다. 독자들이 실망할 수도 있지만, 하는 수 없다.


  인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마르크스의 『자본론』도, 자신의 길을 스스로 갔다. 마르크스가 공산주의를 직접 구현하지 않았지만.


  철학자, 사상가, 글 쓰는 작가 등을 특별한 존재로 볼 필요가 없다. 그들의 저술은 자기자신과 처한 환경을 극복해 보려는 몸짓이었을 뿐. 우리는 그냥  사람일 수밖에 없는 그들을 이해하면 된다.



3. 톱니바퀴는 작동하는가?


  작가는 시계 속 작은 톱니바퀴 하나를 만드는 장인일 수도 있다. 다른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톱니바퀴가 제대로 작동하여, 시계가 맞느냐이다. 만든 이가 개차반으로 살았는지 아닌지가 더 중요치는 않다.


  물론 그 기술자의 삶마저도 본받을 만하다면 금상첨화겠지만~( 약간 비약이기는 하다 )


  성현들이라고 대수인가? 그들이 대접받는 것은, 그들이 했다는 말들과 그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살아남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말이 문자로 쓰여 여기 있다고 해서 진리일 수도 없다.


  그들의 진리 같은 말들이, 지금 나에게는 아닐 수도 있으니까~


  위대한 성인들을 숭배할 필요가 없듯이 작가에 대한 시각도 그러해야 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었는데, 마케팅에서 승리해 살아남은 것은 아닐까?



4. 성현보다 나 자신이다


  성현들이나 작가의 저술은 그들이 한 때 탔던 기차이다. 기차를 타고 가던 성현들도, 중간역에서 돌연 내려 방향을 바꿔 버렸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다른 기차로 갈아탔으면 어떻게 할까?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지나간 글을 통해 그들과 대화를 계속하는 것은 맞다. 그렇지만 나 자신보다 지나간 그들에게 더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어 보인다. 의미는 우리 자신의 삶에서 자기가 스스로 찾는 게 더 좋을 수 있다. 그들에 기대지 않고.


  정치가의 트위터나 글을 보고 혹했다가 실망할 수도 있다. 거룩한 시인의 고귀한 시에 감동했다가 그의 행실에 아연실색(啞然失色)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실망하게 만든 작가를 모조리 쓰레기 취급할 것도 없다. 어린아이를 목욕시키고 목욕물만 버리면 되지, 어린아이까지 버릴 필요는 없으니까.


 "글로써 타인을 감동시키거나 설득시키고 싶다면 진실하라. 진실은 사실과 다르다. 사실을 통해 그대가 얻은 감정이 진실이다."   

-이외수《글쓰기의 공중부양》 p98.


  글 쓰는 이는 글 쓰는 순간 진실하다. 그 글이 사실이 아닌 것에 기반했던 것으로 판명날 수도 있지만, 쓰는 순간의 감정은 순수하고 진실할 수 있다. 그러니 글에서는 글 쓰는 이가 순간 느꼈던 '지나간 진실'을 엿본다고 생각하면 된다.


  100% 믿을 필요도 없다. 작가를 숭배할 필요도 없다. 성현을 숭배할 필요도 없다. 여신을 숭배할 필요가 없듯이. 인간은 그저 사랑의 대상일 뿐이다. 성현들도 그렇다.


    그러니 어떻게 생각하는 게 좋을까? 스스로 구체적인 언어로 글을 쓰고, 자신의 말로 수다를 떤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글 쓰는 행위를 통해, 지구에 영향을 미치고, 우주에서 공감을 얻을 수도 있으니까~



5. 맞아 수다로 풀까


  <그래, 수다로 풀자>의 작가 오한숙희는 두 아이의 엄마로 34살에 이혼했다. 십수 년 전 강변북로길 라디오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여자 혼자 어떻게 세파를 헤쳐나갈까 걱정도 들었다. 그래도 그녀가 용감히 사는 모습을 보여 주어 나중엔 안심이 되긴 했다.


  삶을 수다로 풀어가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위협처럼 보였던 '여성학'에 대한 반감도 낮췄다. 그녀의 말처럼 글이나 말은 수다의 도구일 수 있다. 실용문을 제외한, 주로 소설·수필·에세이·시 등, 지구상 82% 이상의 글은 수다라고 생각하면 어떨지 모르겠다.


  기쁘고 슬픈 삶을 담을 글들.

  희로애락을 노래하는 글들.


  기쁜 수다.

  슬픈 수다.

  노여운 수다.

  공감을 위한 수다.   

  수다를 위한 수다.


Image by Oleksandr Pidvalnyi from Pixabay

  김창옥 교수 강연에서 들었던 말이 생각난다.


  "얘, 친구야~ 나 어때? 살~ 많이 쪘지?"

  "기지배~무슨? 딱 좋아. 딱 좋아. 더 먹어."

  "하하 하하~"

  "하하, 호호~~"


  이렇게 수다 떨면 재미가 있을 것 같다.


  내가 쓰는 글들도 수다이다.



표지이미지 : Image by 5688709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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