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가 제멋대로 치달아도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래서 더 매력적이다.
배우 진선규의 말처럼 <극한직업>은 분명히 <범죄도시>와는 다른 흥행 양상을 띠고 있다. <범죄도시>가 ‘의외’로 볼만 했던 것에 비하면 <극한직업>은 ‘그래서’ 볼만 했다.
많은 졸작들의 문제점은 그 자신의 졸렬함을 덮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는 점이다. 본래 웃기지도 않고 감동적이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든 그렇게 만들기 위해 무리수를 둔다. 그러니 억지 유머, 억지 감동이 유발되고, 이를 지켜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절로 피로함을 느낄 수밖에 없게 한다. 하지만 적어도 <극한직업>에서는 그러한 점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이렇게 외치는 듯하다. ‘왜? 난 이런 방식이 좋은데. 난 더 내 맘대로 할거다!’ 라고.
<극한직업>은 그 스스로도 천명하듯이 과연 세밀하지도, 치열하지도 않다. 새로울 것 없는 범죄와 사건들을 과감히 들여다 놓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사건을 진행시킨다. 그런데 실로 이들 사건은 이 영화의 매력과 관련이 없어서 오히려 그것들을 진부하다고 평하는 행위 자체를 진부하게 만들어버리고 만다. 영화는 시작부터 캐릭터의 특성을 살리는데 주목하고 영화가 소재로 삼은 핵심 설정을 추구하기 위해 온 노력을 기울인다. 그렇게 한 번 설정을 잡은 뒤엔 그것을 놓치지 않고 집요하게 끝까지 밀어붙인다. 오히려 그런 점이 강한 일관성을 낳고, 영화적 통일감을 준다.
이 같은 통일감은 낯설지 않다. 우리가 일찍이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에서 목격했던 것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막장 B급 영화의 감성에서 특급 영화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의 특성과 장점을 한시도 놓지 않고 불필요한 개념을 모조리 제거했기 때문이다. 해리 하트의 절도 있는 ‘수트 액션’처럼 <킹스맨>은 군더더기 없이 자신의 색깔을 극한까지 밀어붙인다. 그 과정에서 킹스맨은 누구나 생각은 하지만 다루기 힘든 문제를 광기를 핑계 삼아 꺼냄으로써 이전 영화들이 답습하지 못한 지점을 발굴해냈다.
<극한직업>은 우당탕탕 신나는 소동으로 시작해 끝도 마찬가지로 끝내지만 어딘가 애달픈 구석 도있다.
물론 <극한직업>이 <킹스맨>만큼의 강렬함을 지닌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방식이 닮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실로 ‘잠복수사를 위해 차린 닭집이 유명 맛집이 되어버린’ 그 설정 자체도 흥미롭지만 그 과정에서 정의와 의무감 하나만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일을 할 것인지, 추구한 방향은 아니지만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을 할 것인지, 한 개인에게 치명적인 딜레마를 안겨주기도 한다. 이 딜레마는 과연 강력해서 누구도 쉽게 뿌리칠 수 없는 질문이기도 하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우리는 늘 이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 잠 못 드는 밤을 맞이하니까.
그러나 <극한직업>은 이 역시도 깊이 탐구하지 않고 빠르게 흘려보낸다. ‘우당탕당 대소탕 작전’으로 전개시킨다. 실로 이 영화가 갑자기 진지한 문제로 빠졌다면 앞서 ‘졸작의 함정’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작품은 자신의 방식을 고수하면서 해결 방법까지도 그 색깔을 잃지 않는다. 그저 우당탕탕 앞으로 나아가는 것. 진실로 우리의 삶 또한 그렇지 않은가. 어차피 닥쳐올 고민들은 부수거나 피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정면으로 부딪히면서 일망타진하고 성공하면 좋은 거고, 아니면 또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다.
‘나는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죽음의 두려움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에픽텍토스의 말처럼 우리도 무수한 걱정 속에서 두려움에 떨기보다는 <극한직업>이 제시한 것처럼, 더 뛰어들고, 더 나아가고, 더 사랑하고, 그래서 마침내 자신이 진정 원하는 모습을 찾는 것, 그것이 더 좋은 일 아니겠는가. 거칠고 투박하지만 뜻밖의 아픔을 긍정의 에너지로 감싸는 <극한직업>은 과연 자신만의 그 방식 안에서 충분히 대성공을 거둘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