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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을 믿는 자만이 초인이 된다

by 민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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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구할 힘이 있어도 '그 정도'로만 쓰면 '그 정도'만 발휘될 뿐이다. *사진 : 다음 영화, <캡틴 마블>(2019)



자기 자신을 믿는 자만이 초인이 된다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한다면, 천재성은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tvN <더 지니어스 : 블랙가넷> ep.10 클로징 멘트 中


과거 인기리에 종영된 tvN의 <더 지니어스 : 블랙 가넷> 10화에서 하연주는 그 스스로의 뛰어남을 숨기고 구밀복검하며 ‘TOP 4’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마침내 생존자를 가리는 데스 매치에서 절대 강자였던 장동민을 만나 승리를 거머쥐기 직전까지 갔지만, 장동민의 계략에 걸려들어 다 이긴 경기를 그 스스로 망치면서 탈락의 고배를 맞이하고 만다. 그때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동민 오빠를 너무 강하게 생각했나 봐요. (중략) 정말 마음 깊숙한 곳에서 내가 나를 못믿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내가 나를 안 믿으면 누가 나를 믿어줘요.”


실로 어떤 천재적인 재능이 있더라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면 그 재능은 아무런 소용도 없어진다. 마치 <굿 윌 헌팅>(1997)의 윌이 영화 속에서 그 자신의 상처 때문에 능력을 묻어버리며 살았던 것처럼 말이다.


‘크리’ 문명의 힘으로 캡틴 마블의 힘을 얻게 된 캐럴(브리 라슨)도 처음엔 부족의 충실한 수하로 살아가면서 그녀의 리더 욘-로그(주드 로)에게 힘의 통제를 받는다. 하지만 여기서 그녀를 통제하는 건 그의 상관뿐만이 아니다. 거대한 크리 문명의 웅장한 도시 그 자체와 위대한 지도자들의 데이터를 하나로 모았다는 지성의 결정체 ‘슈프림 인텔리전스’ 앞에서 한없이 작게 묘사되는 한 개인의 실루엣은 ‘다수보다 나을 리 없는 하나’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실로 현실도 그러하지 않은가. 이 거대한 도시에서 나 하나가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을 것인가. 내가 이 도시를 움직여봤자 얼마나 움직일 것인가. 그런 생각 속에서 개인의 가치는 한없이 작아져만 간다. 그에게 어떤 재능이 있든, 훌륭한 사상이 있든 간에 말이다. 도시는 ‘자신보다 나을 리 없는’ 개인들에게 끊임없이 복속을 강요한다. 그것만이 살길이라고, ‘위대한 문명을 따르는 것이 곧 영광’이라고 말이다.


결국 반복되는 억압의 세뇌 속에서 자기 확신의 부족은 적과 아군조차도 분별하지 못하게 만들고, 그 스스로가 어떤 모습이길 바라는지, 그조차도 정하지 못하게 한다. 내면에 용솟음치는 힘을 분명히 자각하고 있지만 그걸 꺼내도 되는지, 꺼낸다면 누굴 향해 써야하는지 확신하지 못한 채 캐럴은 계속해서 자기 확신을 찾아 헤맨다.

사실 영화 속에서 캐럴은 큰 위기에 빠지지는 않는다. 몇 번의 위기가 반복되지만 ‘캡틴 마블의 힘’에 비하면 그야말로 ‘대수롭지 않은’ 수준이다. 하지만 그런 그는 ‘대수롭지 않은 일’들에도 자꾸만 위기를 겪게 되는데, 그것은 강한 적도, 외부의 공격도 아닌 자기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과거의 기억들 때문이다.


자신을 주저하게 만들었던 그 모든 과거의 실패들. 그 조각들이 하나의 이유가 되어 현재까지 주저하게 만든다. 정말 힘을 써도 되는지, 힘의 방향을 어디로 향해야할지 알았으면서도 끝내 발목을 잡는 ‘슈프림 인텔리전스’를 ‘내가 정말 이 힘으로 벗어날 수 있을까’라는 자기 의심. 실로 아무리 뛰어난 영웅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힘을 억압하는데 ‘성공’했던, 그것 문명의 총아인 거대한 것에 정면으로 대항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캐럴은 자신의 기억을 되찾는 과정에서 자신이 실패의 결과로 어떤 행동들을 해왔는지 되짚어 보며 마침내 큰 깨달음을 얻고는 자기 확신을 얻게 된다. 그녀는 연약했지만 도전을 주저하지 않았고, 실패했지만 다시 일어났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그런 선택과 모험 끝에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모든 선택이 정말 실패할 선택이었고 운명이었다면 자신은 없어졌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살아있는 건 실패한 운명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니체의 그 유명한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이다’라는 말처럼.


스스로의 운명을 짊어질 수 있는 힘, 그 모든 선택을 짊어질 수 있는 힘을 가진 자야말로 진정 강한 자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알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을 결정한 순간 캡틴 마블은 마침내 자기의 힘을 자유자재로 다루게 된다.


“일생일대의 중대한 역사적 사건을 만들 기회를 앞에 두고 딸과 함께 소파에 앉아 TV나 볼 거야?”


너의 이웃 틈에서도 네 자신을 극복해야 한다. 그리고 네가 네 힘으로 강탈할 수 있는 그런 당당한 권리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차하게 부여받는 일이 없도록 하라.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중


큰 힘은, 그것이 마음껏 활약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내 안의 잠재된 그 큰 힘을 믿고, 그에 걸맞은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음을 <캡틴 마블>은 말해준다. 실패하면 어떤가. 보란 듯이 다시 일어서서 차라리 더 큰 도전을 해버리는 것이다. 정말 길이 아니라면 운명은 당신을 죽일 것이지만, 그럼에도 살아있다면 그 선택은 분명 내면의 힘으로 축적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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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럴은 본모습을 숨기고 문명 속에서 부대끼는 모두를 빗댄다. *사진 : 다음 영화, <캡틴 마블>(2019)



탈을 써야만 살아남는 사람들


영화에 등장하는 스크럴 종족은 데비안트 스크럴로, 스크럴로스 행성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던 스크럴 종족을 셀레스티얼이라는 존재가 유전자 실험으로 세 가지 종으로 인위적으로 분화시키면서 탄생한 일족 중 하나다. 이들은 같은 스크럴 종족을 몰살하고 안드로메다 은하계의 무수한 종족들을 복속시키며 스크럴 제국을 건설한다. 이처럼 원작에서는 매우 호전적인 종족으로 묘사되지만, <캡틴 마블> 안에서 각색을 거치며 ‘변신 능력’에만 의미가 부여된다.


이 작품 속에서 스크럴의 변신 능력은 ‘살아남기 위한 것’으로 묘사된다. 이를 보면 국가도 없이 타국을 전전하며 떠돌이 생활을 했던 집시나 유대 민족들이 떠오르는데, 그들이 당한 수난을 생각해보면 스크럴에 대한 묘사가 그리 가볍게 다가오지만은 않는다. 모습과 생각, 목소리와 문화 양식까지 완벽하게 재현해내는 그들의 모습은 비단 문명 속에서 소외된 이들 뿐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어떤 탈도 마다않는 이 시대 현대인들의 모습을 묘하게 빗대기도 한다.


그런 상황 속에서 영화 <캡틴 마블>은 그들에게 시종일관 같은 해답을 제시한다. 영화는 스크럴 종족에게 ‘그들이 모여 살 수 있는 평화로운 집’, 다른 생명체들의 DNA를 ‘완벽 복제’하고 자신의 얼굴을 숨기고 살아가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계로의 이주를 권한다. ‘나보다 나은 것은 없다’며 끊임없이 자신에게 복속될 것을 강요하는 거대 문명을 벗어나 그들만의 문화와 양식을 지켜나갈 수 있는 또 다른 세계를 찾는 것. 그런 점에서 스크럴과 캡틴 마블이 끝내 '지구의 반대편으로' 같은 길을 가게 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어벤져스 : 인피니티 워>(2018)에서 문명 세계는 이미 파괴의 광기 속에 생명체의 절반이 사라지는 참사를 겪었다. 문명의 광기란 그런 것이다. 문명이 거대해질수록 문명을 살리기 위해 개인의 희생쯤은 대수롭지 않게 되고, 개인이 문명의 탈을 벗고 오롯이 자신의 신념과 양심에 따라 행동하기는 더욱더 힘들어진다.


그렇기에 이런 점을 살펴보면 <캡틴 마블>이 지향하는 세계는 확고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개인이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며 살 수 있는 세상. 그 자신의 능력을 믿고 온전히 펼칠 수 있는 세상 말이다. 그것이 신념이 되었든, 재능이 되었든, 그 모든 것이 곁눈질이나 손가락질 받지 않고도 수용될 수 있는 수준 높은 세상 말이다. 정말 꿈같은 세상이다. 과연 그런 세상은 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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