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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그러진 욕망을 부수는 '진짜 욕망'

by 민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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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의 감옥에 갇힌 원초적 욕망



먼저 <아가씨>를 접하기 전에 프로이트의 욕망에 관한 관점을 살짝 들여다보는 것이 좋겠다. 우리는 모두 욕망을 가지고 있다. 특히 성적 충동인 리비도는 우리의 삶을 나아가게 하는 핵심 동력으로 작용하며 다양한 형태의 행동으로 표출된다. 가령 예쁘고 멋진 남녀를 보게 되면 절로 이끌리며 시선을 준다던가하는 이치와 같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욕망을 곧이곧대로 표출하진 않는다. 사회나 윤리, 그리고 여러 가지 환경들이 우리의 욕망을 적절히 억압하기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이 욕망이 적당한 분출구를 찾지 못하고 지나치게 억압되면, 왜곡되어 노이로제로 발전하게 된다. 이 노이로제는 심한 정도에 따라 종래엔 히스테리로 발전하여 이상행동을 하는 근본적 원인으로도 작용한다.


때문에 프로이트는 욕망을 적절히 잘 투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인간의 올바른 정신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며, 또 그것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이미 왜곡되버린 사람도 ‘치료’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야기가 조금 샜지만 어찌됐건 욕망이라는 늑대를 가두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면 문제가 생기며, 또 이를 잘 풀어내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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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이 전개되는 대부분의 시간동안 카메라는 답답한 움직임을 보이고, 인물들은 프레임에 갇힌다.



사건의 중심지가 되는 히데코(김민희)의 저택은 바로 욕망이 출구를 잃은 그 ‘욕망의 감옥’으로서 충실하게 표현된다. 영화를 본 사람이면 느끼겠지만, <아가씨>의 카메라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카메라 기법과 다소 유사한 느낌을 준다. 패닝(Panning:카메라가 상하좌우, 직선으로 따라 움직이는 기법)을 위주로 프레임을 조작하는 카메라는 배경의 움직임은 최대한 억압하고 그 속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의 동선만 살려둔다. 이는 이미 카메라의 시선부터 욕망의 주체인 주인공들을 프레임으로 가두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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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희도 히데코의 저택에 들어오는 순간 카메라에 '포획'된다.



초기에 히데코를 파멸시키고자 투입되는 숙희(김태리)에겐 핸드-헬드(Hand-held:카메라의 고정 장치를 해제하고 손을 사용해 극단의 자유를 주는 기법)를 허용하면서 욕망의 중심부인 히데코에겐 정적인 앵글만이 허용된다. 결국엔 숙희도 히데코와 욕망의 동화를 이루면서 함께 같은 프레임에 갇혀버리지만, 이는 욕망보다는 2차원적인 것(물질, 즉, 돈)에 관심이 있었던 숙희가 본연의 욕망으로 돌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부분이다.


답답한 카메라의 움직임만큼 히데코의 저택은 극도의 억압으로 가득하다. 책을 보존하기 위해 햇볕도 잘 들지 않는 집. 후에 밝혀지지만 이 책들은 변태적 성행위에 대한 일종의 야설과 카마수트라 같은 성행위 지침서들로 이루어져있는데, 이 저택은 그야말로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상징하는 이들을 ‘가두기 위해’ 설계된 것처럼 보인다. 수많은 문들로 이루어진 이 공간은 반드시 문과 문 사이를 통해 지나가야만 한다. 즉, 허락된 구획 이외의 탐색은 허용되지 않는다. 분출되지 못하고 왜곡된 욕망들이 이 저택으로 몰려들고, 그 욕망들은 허용된 구획 안에서만 떠돌게 된다. 따라서 저택은 욕망의 감옥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런 한가운데 히데코는 자신의 재산과 왜곡된 욕망, 사디즘(sadism:대상에게 고통을 주어 쾌감을 얻는 변종 성애)에 사로잡힌 외삼촌 코우즈키(조진웅)에 의해 비록 저택의 아가씨지만 저택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왜곡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로 활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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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저층부, 욕망의 단계를 잘 드러내는 서재공간


이 모습은 욕망이 오랫동안 분출구를 찾지 못해 극도로 왜곡돼 변태적인 모습으로 탈바꿈한 정황을 은유하고 있다. 변태 성욕을 충족하는 공간은 영화에서 저택의 아래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점점 심한 모습으로 탈바꿈하며 어둑한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이는 인간의 무의식 저층부를 시각적으로 묘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히데코가 변태 야설을 낭독하는 공간 입구에 ‘뱀 조각상’이 수문장처럼 서있는 까닭은 뱀이 지니는 상징성(성적 결합, 욕망 등) 바로 그 공간이 욕망의 입구임을 설정하는 이정표이며, 처음엔 책들로 구성된(이론적 영역으로 순화된) 복도를 지나 행위와 서적의 중간 지점인 ‘낭독’과 ‘행위 시연’으로 표출되고 영화 결말부에 이르러 폭로되는 ‘지하실’은 왜곡된 욕망의 궁극을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주인공인 히데코도 억압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다소 일그러진 자아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그녀의 말마따나 ‘구원자 숙희’를 만나면서 해방의 출구를 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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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이 함정을 가두고, 다시 함정이 두 함정을 가둔 채 탈출한다


<아가씨>는 영화의 구조적인 면모뿐 아니라, 영화의 플롯과 내러티브 자체도 욕망의 억압과 출구를 잘 은유하고 있다. 영화의 핵심 추진력인 히데코의 재산은 사실 내러티브를 유지하기 위한 골조에 불과하고 그 내용물은 철저히 ‘욕망의 감옥’으로서 충실하다. 이 욕망의 감옥들은 세 가지 함정으로 드러나 서로를 침몰시키고 최후의 함정이 승리해 탈출하는 그림을 그리는데, 억압으로 일그러진 욕망의 감옥들은 보다 순수한 욕망의 분출로 제 목적을 달성하지도 못하고 파괴되는 지경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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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거울에 본래의 자아(숙희)를 주입하는 히데코


히데코는 왜곡된 변태적 욕망으로부터 탈출하기를 염원하지만,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던 욕망까지 뿌리 뽑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녀는 왜곡된 욕망의 주체들은 모두 거절하지만(히데코는 극중 왜곡된 욕망의 주체인 남성들 누구와도 관계를 가지지 않는다), 자신이 추구하고자 했던 본래의 욕망(숙희)은 받아들인다.


극중 숙희가 히데코의 거울에 비친 모습으로 종종 표현되는 까닭 역시 거울이 정확하게 사물을 표현하지만 또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물로 숨겨진 히데코의 욕망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숙희를 통해 자신이 진정 원하는 모습을 깨닫고 이를 되찾기 위해 히데코는 자신을 옥죄던 감옥을 모조리 숙청할 준비를 한다. 그녀가 백작을 이용해 저택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얻은 것이 함정의 개수만큼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물욕(백작)을 파멸시켜 다시 자신이 그 물질의 주인이 된다는 것, 둘째는 왜곡된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탈출하는 것, 셋째는 주체적 인간으로서 자신의 자아를 온전히 되찾고 욕망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것이다.


엔딩부에서 저택을 넘어 숙희의 손을 잡고 광활한 들판으로 도망치는 히데코의 모습, 그리고 그 둘을 진정한 자유의 세계로 인도하는 ‘도구’인 백작의 흐릿한 포커스는 영화의 주인인 히데코가 욕망의 주인으로 거듭나게 되었음을 매혹적으로 드러낸다. 애초 욕망에게 잠식돼 오히려 도구로 전락한 주인이, 다시 욕망을 발아래 지배하고 주인의 지위를 되찾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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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욕망의 주인, <아가씨>


<아가씨>는 그릇된 억압으로 욕망을 가두어 욕망의 주인이면서 욕망들에게 잠식당해 몸부림치는 이 세계의 수많은 ‘아가씨’들에게 보내는 탈출의 신호다.


극중에서는 동성애라는 한정적인 컨셉과 섹스라는 원초적 욕망의 본질을 통해 욕망을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나, 이는 우리가 가진 욕망 어디든 치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극중에 등장한 다양한 욕망 탐닉은 일종의 예시인 셈이다. 한정된 러닝 타임에 모든 욕망을 담아낼 수도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현재 자신의 어떤 욕망이 감옥에 갇혀있는지는 영화를 보고난 관객들 스스로 판단할 일이다.


차마 말할 수 없는 것, 나는 원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시선이 신경 쓰여서 관두거나 내면 깊이 감춰둔 그 모든 욕망들. 박찬욱 감독은 이제 그 욕망들을 가두다가 병적인 히스테리로 만들지 말고 분출할 것을 권한다. 그리고 그는 히데코처럼 왜곡된 욕망과는 절대 타협하지 않고 계략을 써서라도 맞서 싸우며, 순수와 열망으로 뭉친 순도 높은 욕망에 열광할 것을 주문한다.


눈을 떠라, 자신의 욕망에.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을 위해서.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

세상 모든 ‘아가씨’들이 내 인생을 정의하는 ‘그 무엇들’을 부수고 구원할 숙희를 만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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