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에 성공한 적이 있다. 일을 크게 만들지 않으려고 가만히 참으며 살다 보면 그걸 또 만만하게 보고 기어이 전쟁을 벌이는 이들이 있는데, 『손자병법』에 나온 대로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지만 전쟁이 일어났으면 최대한 신속하게 상대를 정복해야 한다'는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는 있다.
그런데 복수에 성공했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기분 좋은 통쾌함은 정말 잠깐 있다가 사라진다. 이기기는 했어도 그건 그야말로 상처뿐인 승리다. 결국 전쟁이 상대를 해쳐야 하는 것이라면 나 역시 창을 꼬나잡고 무서운 얼굴을 하고서 어떻게든 찌르기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샌가 나 자신도 험악한 인간이 되어있을 때도 있고 가장 중요한 것은 승리했다고 해서 과거에 상대로부터 받은 상처가 치유되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저 상대도 빈사 상태로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고 나 역시 과거에 받은 상처에 더해 억지 주먹을 들게 된 기분 나쁜 죄책감 같은 것들이 온몸을 휘감을 뿐이다. 그나마도 복수할 대상이 복수할 가치가 있을 때의 이야기인데, 복수할 대상이 형편없는 인간이라면 또 이야기는 달라진다.
영화 <자토이치>의 무사 하토리
영화 <자토이치>에서 검객 하토리는 과거에 자신에게 굴욕을 안긴 무사에게 복수하려고 검술을 연마해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그를 찾게 되지만, 그는 이미 병들어 몸을 가눌 수 없는 상태였다. 벨 테면 베라고 하는 무사 앞에서 하토리는 조용히 검을 집어넣는다. 강자가 약자를 상대하지 않는 건 단지 자비나 양심의 가책에 기대서가 아니다. 약자가 나에게 해를 끼쳐도 그냥 가만히 두는 것은, 그들을 적으로 두기에도 적절치 않기 때문이다.
나보다 약하고 못난 사람에게 이겨 무엇을 얻는가. 이익의 종이 되어버린 속물조차도 그런 대결은 즐겁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러한 일을 즐긴다면, 그는 매우 수준이 낮은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그가 투쟁해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그 정도라는 것이고, 그의 능력이 간신히 약자를 이길 수준밖에 안 된다는 것이니까. 그래서 고상한 인간은 그만한 수준의 적을 두기 마련이다. 벼룩에게 일개미는 꽤나 위협적인 적이겠지만 사자에게 일개미는 상대할 가치조차 없는 상대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자신이 상대하고자 이빨을 드러내는 대상, 그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 자신의 가치도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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