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슬레이브'의 '황혼보다 어두운 자여, 내 몸에 흐르는 피보다 붉은 자여'로 시작하는 주문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면
판타지 장르물을 어릴 적부터 즐겨봐 왔던 사람이라면 주인공들이 쓰는 강력한 피니셔를 하나쯤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판타지 세계에서 검의 궁극에 다다른 자는 '소드 마스터'로 불리기 마련이고 소드 마스터 중에서도 역사에 남을 만한 위인들은 '그랜드 소드 마스터'로 불린다. 사용하는 무기에 따라 '아쳐 마스터' 같은 별칭이 붙기도 하며 마법사는 '서클'로 명칭 된 마법의 단계에 따라 9서클, 10서클의 클래스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최상위 검사들은 검에 실리는 무형의 기운 '검기'를 이용한 기술로 실력을 뽐내고 궁극의 마법사들은 '메테오 스트라이크' 같은 공간계 지역 초토화 마법을 구사한다.
아마 9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밀레니얼 세대라면 누구나 기억하고 있을, 일본 애니메이션 <슬레이어즈>(1995)에 등장하는 대마도사 리나의 궁극기 '드래곤 슬레이브' 역시 이쪽 세계에선 유명한 필살기였다. 서사시에나 쓰일 듯한 멋진 대사를 완창한 뒤 쏘는, 판타지 세계 최강자 드래곤까지 소멸시킬 수 있는 파괴 광선의 강렬함. 이처럼 저마다 사용하는 주인공이나 모습은 달라도 대체로 '이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궁극기는 막대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마법의 힘으로 적을 일거에 소멸시킬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을 자랑하곤 했는데, 비단 그것은 SF 영역인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로 넘어가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스타워즈>(1977~) 시리즈의 가장 강력한 무기 하면 떠오르는 '스타 디스트로이어' 함선이 무식한 레이저 포 무장으로 달려드는 수많은 우주선들을 가루로 만들어버리거나, <기동전사 건담>(1979~) 시리즈에 등장하는 주인공급 주요 기체들이 건담 한 기로 '세력과 맞붙을 만한' 무지막지한 무장으로 적들을 쓸어버리는 것이 대표적이다. '윙 제로 커스텀 건담'의 트윈 버스터 라이플, 전함 '아크엔젤'의 로앤그린 양전자포 같은 것들의 파괴력을 떠올리면 공상과학의 상상력도 판타지 세계의 상상력에 못지않다는 걸 체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모든 장르물에 등장하는 궁극의 기술이나 병기는 모두 '파괴'를 목적으로 한다. 주인공이 시련을 극복하면 더 큰 마물이나 적이 등장하고, 그 적을 극복하면 또다시 더 강력한 시련이, 그걸 반복하다 보면 결국에는 신이나 최강의 존재와도 맞붙게 되는 게 이세계(異世界)의 암묵적인 룰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작년에 넷플릭스에서 영상화된 <이세계 삼촌>을 보면 조금은 다른 방식의 '최강 기술'이 등장하는 걸 볼 수 있다.
현실로 돌아온 삼촌이 이세계에서 있었던 일을 마법으로 보여준다는 독특한 설정의 애니메이션 <이세계 삼촌>
동명의 만화 <이세계 삼촌>(2018~)을 영상화한 애니메이션 <이세계 삼촌>(2022)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작품이다.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는 2010년 무렵부터 성행하기 시작한 게임 판타지물의 공식을 따르고는 있지만 <소드 아트 온라인>(2012~)처럼 첨단 VR기기와 가상현실게임과 같은 별도의 세계관을 요구하지 않는다. 현실 세계와 이어진 어떤 '이세계(異世界)'에 혼수상태였던 삼촌이 다녀왔다는 설정으로, 게임 프로그램 안에서 모든 게 진행되어야 하는 기존 게임 판타지물의 한계를 넘어 현실 세계에서도 판타지 요소를 자연스럽게 쓰게된다는 설정을 보여준다.
예컨대 이세계에서 정령마법을 익힌 삼촌이 현실 세계에서 돈을 벌기 위해 유튜버 활동을 시작 한 뒤 변신 마법으로 인기를 끌거나, 더운 여름에 에어컨 살 돈이 없어 얼음 정령의 힘을 빌려 아파트에 빙결 마법을 쓰는 것 같은 설정이 그러하다.
독특한 설정 말고도 단순히 판타지적 요소로 따져보아도 <이세계 삼촌>은 클리셰를 잘 따르지 않는다. 잘생기고 유능한 주인공들이 사투를 벌이는 일반적인 작품들과는 달리 이 작품의 주인공 '삼촌'은 너무 못생기고 노안인 까닭에 이세계에서 '오크(흉측한 생김새의 아종족)' 취급을 받으며 사냥을 당하기까지 한다. 복수나 성취 같은 인물의 기본적인 행동 동기도 없으며, 주인공은 단지 게임을 사러 갔다가 사고를 당한 뒤 얼떨결에 이세계에 떨어져 현실로 귀환하는 게 목적일 뿐이다.
한 편, 극의 구성도 이세계의 삶을 먼저 중계하고 복귀 후의 삶을 다루는 순차적인 구성도 아닌, 현실 복귀 후의 삼촌이 기억 마법을 영창 해서 조카에게 이세계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는 '극중극'의 형식을 띠는데, 이세계에서 현실로 복귀한 시점에서 이미 결말이 정해져있다는(이세계의 결말을 보았기 때문에 현실로 돌아왔을 것이므로) 점 역시 독자들에게 더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드는 포인트이기도 하다.
미치지 않으려고 중얼거리던 삼촌은 빛이 말을 걸어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빛의 정령이 시킨대로 최초의 주문을 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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