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는 쉽게 쓰이지 않는다

by 민경민

*2023.12.19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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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에 강연을 보러 갔을 때의 일이다. 그 강연은 꽤 규모가 큰 중견기업의 회장님이 직접 학생들을 대상으로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강연이었다. 내용은 유튜브에 떠도는 자기계발 영상이나 서점에 꽂혀있는 유명 자서전의 내용을 그대로 답습한 것들이라 크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유달리 기억에 오랫동안 남는 장면이 하나 있었다.


강연이 거의 끝날 때쯤 회장님은 인자한 얼굴로 학생들을 둘러보며 지금 현재 역경을 이겨냈거나 힘든 과정을 지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손을 들라고 했다. 그 말에 몇 사람이 손을 들었고, 회장님은 1층 제일 구석에 가장 먼저 손을 들었던 키 큰 남학생을 호명했다. 박수를 받으며 학생이 단상 위에 올라서자, 신상을 묻는 간단한 질문과 대답이 오간 뒤에 회장님은 그에게 살면서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리고 남학생은 한참을 고민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토익 공부를 하고 있는데 점수가 잘 오르지 않아서 그게 힘든 것 같습니다."


나는 당시 2층에서 그 강연을 보고 있었는데, 아직도 그때 회장님의 당황한 표정과 연단 아래 비서실 사람들의 술렁대는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아마도 회장님이 기대한 것은 고아로 태어나 노가다판을 전전하며 힘들게 번 돈으로 대학에 진학한 자수성가의 아이콘쯤이었을지 모른다. 아니, 설령 그런 극적인 인생을 살지 않았더라도 살면서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마다 한두 가지쯤은 내보이고 싶지도 않을 고민을 가지고 있을 텐데, 토익 공부가 가장 힘든 일이라고 하는 사람에게 주어지기엔 자리에 들인 품이 너무 컸다.


회장님과 비서실장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까닭은 학생의 발언 다음 밝혀졌다. 회장님은 자기 손에 차고 있던 시계를 벗어 그 학생에게 선물로 주면서 힘든 일이 생기면 오늘 받은 이 시계를 기억하라며(굳이 명품 시계라는 걸 한 번 더 강조하고서) 강연을 뜨거운 눈물과 박수의 바다로 마무리 지으려 했다. 뭐라도 해줄 것처럼 불러놓곤 이유가 성에 차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벗어주려 했던 시계를 안 주자니 민망하고, 애초에 '설마 이 정도 고민도 없을까'라며 변수를 시나리오에 상정하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한 오기 때문에라도 그 비싼 명품 시계는 전달돼야 했다. 토익 공부가 가장 힘들다는 사람에게 전달돼서 문제였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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