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행>(2016)
대항할 수 없는 운명적인 사건이 인간들을 덮치고, 인간들은 삶을 지키기 위해 시스템을 만들어 모든 위험요소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왔다. 하지만 그 결과 시스템은 거의 모든 인간의 의지를 합한 정도로 너무 거대해졌으며, 시스템이 위기에 처할 때 인간은 도리어 도구가 되어 시스템의 안전을 지키는 방패막이로 전락하고 만다. 학교(돼지의 왕)나 동네 마을(사이비) 수준에서 작동하던 시스템은 점차 국가 단위의 크기로 커져 종래엔 마치 우리가 지구의 굴곡을 보지 못하듯,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도 망각하고 만다.
연상호 감독의 ‘쌍둥이’ 영화 <부산행>(2016)과 서울역(2016)의 무대는 전형적으로 시스템이 거대화된 현대 사회를 그려낸다. 기차는 첨단의 이기를 안고서 철도와 역사를 철저한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하나의 운송 시스템이다. 그곳의 군중들은 기차가 지시하는 방향 외에 다른 방향을 선택하지 못하고 시스템 안에 안착해 목적지의 도착을 기다릴 뿐이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의 삶을 지탱하는 근간은 어디에 있는가. 연상호 감독은 그것이 경제원리에 의해 돌아가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있다고 본다. <부산행>(2016)에서는 좀비 바이러스가 무형의 경제 가치인 주식과 자본이 ‘유선 바이오’라는 회사를 살려냄으로써 시작되고, <서울역>(2016)에서는 시스템에 종속되어 ‘있을 자리’가 분명한 이들이 길바닥에서 신음하는 인간을 외면한 결과 노숙자에게서 좀비 바이러스가 시작된다. 주식, 화폐와 같은 무형의 자산과 부동산으로 대표되는 자산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삶의 요소가 되었지만 많은 수의 인간들이 그 시스템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도리어 시스템의 변두리에서 쫓기거나 위협당하는 신세가 된다.
꼭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진실로 현대 사회의 거대한 시스템이 만들어 내는 생지옥의 면면은 처참하기 짝이 없다. 2007년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 속에서 월가의 은행과 증권가가 벌인 고삐 풀린 금융 사기극은 수백만 명을 길거리로 내몰고 몰려든 전 세계의 투자금을 휴짓조각으로 만듦으로써 세계 경제를 무너뜨렸다. 거리에서조차 쫓겨나 거대한 빗물 터널에서 익사의 위험을 안고 살아가는 라스베이거스의 노숙자들이나, 폭등한 집값 때문에 빈집이 넘쳐나는데도 집에서 살지 못하고 운하에 정박한 배에 얹혀사는 런던의 시민들, 그리고 그마저도 없어 무단점거 운동을 벌이는 스콰팅까지.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아래 마땅히 정당화되는 ‘인간 없는 사회’ 속에서 내몰린 인간들은 해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일상적 수준에서 시스템에 의문을 제기하고 반발하는 인간을 찾기란 어렵다. 대부분은 이를 추종하거나 순응해버린다. 연상호 감독의 작품에 등장하는 좀비들은 막연히 현대 사회의 시스템에 기대고 있다가 그 자신이 물리기 직전까지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대중들의 전형을 표현한다. 프로이트는 이들을 일컬어 정적 대중이라고 부른다. 설령 딱히 잘못한 것이 없는데 벌어진 재앙 속에서 뭔가가 잘못됐음을 지각하고 시스템의 존재를 깨달은 이들이 있다 하더라도, 앞서 언급한 시스템의 추종자들과 언제든지 시스템의 도구로 전락할 정적 대중들의 위협은 지각한 자들의 퇴로를 더더욱 조여온다.
<서울역>(2016)
<서울역>(2016)에서 주인공 혜선과 노숙자가 좀비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지하철 선로에 내려갔을 때 ‘집에 가고 싶다’라는 주인공의 말에 노숙자는 ‘갈 집도 없다’라며 펑펑 운다. 시스템은 이미 이들이 돌아갈 자리를 앗아갔다. 하지만 뒤로는 정적 대중이 시스템의 도구가 되어 좀비가 된 채 이들의 심장을 노린다. 이들은 끝끝내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모인 광장에서 삶을 구해보지만, 노숙자는 시스템의 지휘하에 시민들을 제압하는 수도사령부 군인의 총탄에 희생되고, 혜선은 세상이 끝나가는 지경에도 빚을 받으러 온 지독한 자본주의 시스템의 신봉자, 포주에게 잡히는 신세가 되고 만다. 쌍둥이 영화인 <부산행>(2016) 속의 인물들 역시 오갈 데 없이 기차라는 시스템 속에 갇힌다. 종말적인 사태가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기차가 순항하는 동안 스스로 방향을 결정할 수 없는 가운데 안전한 곳을 찾아 몸을 숨기는 수밖에 없지만, 그들 역시 좀비와 편견에 휩싸인 시민들에게 내몰리는 처지에 놓인다.
사실 출구 없는 이들의 탈출기는 연상호 감독의 전작 애니메이션들 속에서도 반복되는 내용이다. <돼지의 왕>(2011)에서 매춘부인 어머니 밑에서 퇴학당한 철이나 군대라는 시스템 속에서 전역 말고는 빠져나갈 길이 없는 가운데 모든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창>(2012)의 정 병장, 망나니 같은 아버지 때문에 대학 등록금을 날리고 반석 교회에 들어갔던 <사이비>(2013)의 선영까지. 혹은 지옥이라는 거절할 수 없는 시스템에 포박당한 최초의 <지옥>(2004) 속 인물들처럼 시스템은 비록 이것을 자각하고 탈출하려는 시도를 하더라도 끝끝내 인간을 파멸로 내모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마땅히 도망칠 곳도 없는 지옥과 같은 상황 속에서, 연상호 감독은 문득 자신이 지옥에 있다는 걸 깨달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문할 것인가.
<반도>(2020)
영화 <반도>(2020)의 엔딩 시퀀스에서 민정은 상처 입은 채 가족과 정석의 퇴로를 봐주다 끝내 좀비들 속에 고립돼 자살을 시도한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UN군 지휘관은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일'이라고 평가하며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그녀의 자식들을 헬기에 태우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정석은 '서로가 서로를 뜯어먹는 지옥 속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외면하는 것이 아닌, 본인의 의지로 지켜야 할 가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투신한다. 바로 이성과 관념이 지배하는 세계가 아닌 인간이 인간을 구출하는 세계를 위해서 말이다. 이어 헬기 탑승 후에 준이가 지옥을 벗어나 자유로운 세상으로 떠난다는 지휘관의 말에 “이 세상도 나쁘지 않았다.”라고 하는 말의 저의는 이념이 권위를 갖는 세계 속에서 죽음조차 합리화하는 것보다 비록 고통이 따르더라도 인간을 먼저 생각하고 구출할 줄 아는 세계가 더 낫다는 인본주의적 뜻을 담고 있다.
극중 배영재 PD *<지옥>(2021)
시스템이 인간을 구할 수 없다면(도리어 파괴한다면) 인간을 구할 수 있는 건 인간뿐이라는 건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연상호 감독은 말과 생각에 불과한 시스템이 인간을 파괴하고 다닐 때, 이 사태에서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능력이나 영웅적 자질을 가진 위인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들은 <염력>(2018)의 주인공 석헌처럼 은행 경비원일 수도, <지옥>(2021)의 배영재 PD처럼 방송국 직원일 수도 있다. 특히 <염력>의 석헌은 국가에 큰 파장을 미칠만한 능력을 얻었어도 거창한 계획과 신념을 세우지 않고 당장 달려가 용역업자로부터 딸을 지키거나 딸의 가게에서 맥주 배달에 초능력을 쓰는데, 연상호 감독에게 인간을 구하는 초인이란 그런 것이다. 연상호 감독은 <지옥>(2021)에서 권력을 장악한 새진리회 사제들 앞에서 거침없이 비판을 쏟아내는 배영재 PD의 모습처럼, 혹은 극의 말미에서 “인간들의 세상은 인간들이 알아서 해야죠”라고 말하며 민혜진 변호사를 빼돌리는 택시기사처럼 인간을 파괴하는 현상을 지각하고 좌시하지 않는 이들이 곧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재난 속에서 서로에게 구원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란 곧 우리 자신이며, 세계가 지옥과도 같을 때 사태를 직각하고 구원의 기치를 올릴 수 있는 것 또한 우리 자신임을 연상호 감독은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