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상호-지옥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2)

by 민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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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아에게 '고지'를 하는 천사 *<지옥>(2021)


시스템의 발견


이유 없이 파괴되는 인간들이 딱히 잘못한 것이 없을 때, 신을 부르짖던 이들은 새로운 죄를 요청했다. 비약이 있을지언정 어떤 경우라도 완전한 삶을 사는 인간은 없기에 이런 요청은 해석하기에 따라 언제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될 수 있었으며, 곧 그들이 만든 신의 적절한 만찬이 되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서라도 죄를 씌울 수 없는 인간이 있다면, 또한 그런 인간이 처형을 당해야 한다면 그 누가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인가.


<지옥>(2021)에서는 마침내 갓 태어난 신생아가 천사에게 고지를 받기에 이른다. 인간의 파괴를 그럭저럭 받아들이며 살아가던 대중들은 원죄론적인 추궁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인간인 것이 죄라면, 어떤 행동을 해도 처형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며 결국 삶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 된다. 새진리회가 부르짖던 ‘정의로운 삶’조차도 처형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때엔 이미 처형되는 사람들은 신의 의도를 전하기 위해 죄를 짊어지고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극중 공형준 교수가 말했듯이 그저 무작위로 사람을 해치는 ‘재난’ 아래에서 죽어갈 따름이며, 새진리회란 그 재난 위에서 돌아가는 하나의 망상일 뿐이다.


연상호 감독은 그저 인간이라는 이유로 징벌을 가하는 존재는 두 가지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무작위의 자연 그 자체이고, 또 하나는 실체가 없지만, 인간들의 뇌리를 떠도는 말과 생각 그 자체다. 그건 마치 최초의 부족 사회를 이룬 인간 중에서 폭풍우를 보고 ‘신의 분노’라고 외치던 제사장의 말과도 같은 것이고, 그 제사장이 무수한 자연물과 현상에 신의 이름을 부여한 것과도 같다. 그것들이 한데 모여 체계를 이루고, 인간이 닥쳐오는 무작위성에 목숨을 잃거나 공포에 떨 때 거기에 적절한 이유를 제공하거나 심지어 원인을 파악해 제거한 후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그 의지에 인간들이 마침내 자신의 이지를 의탁할 때 그 실체가 없는 어떤 무엇은 비로소 ‘시스템’으로 군림하며 사람들의 목숨을 위탁받는다. 이런 가운데서 연상호 감독이 무엇을 더 경계할지는 굳이 더 생각하지 않아도 뻔하다.


<사이비>(2013)


시스템의 사전적 정의는 ‘필요한 기능을 실현하기 위하여 관련 요소를 어떤 법칙에 따라 조합한 집합체’이다. 인간의 생활을 정의하고 기능케 하는 거의 모든 정신적 실체를 이 시스템의 범주에 넣을 수 있지만, 특히 인간들을 사지로 내모는 시스템은, 두 가지를 즐겨 먹는다. 바로 증거와 비밀이다. 연상호 감독의 장편 애니메이션 <사이비>(2013)에서 수몰 지역으로 지정된 시골 마을에 사이비 종교단이 들이닥쳐 사람들을 현혹시킬 때 가장 먼저 행한 것이 그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게끔 믿을 수 있는 증거를 만들어 내는 일이었다. 플라시보 효과를 이용해 폐병 환자의 증상을 일시적으로 완화하거나 혹은 배우를 섭외해 앉은뱅이가 목사의 안수 기도에 벌떡 일어선다는 기적을 연출한다. 증거는 분명히 사람들을 마취시킨다. 설령 잘못된 것이라 할지라도 당장 이치에 맞으면 믿어버리는 것이 인간이다. 사이비는 그런 속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반석 교회 일당 밑에서 일하는 깡패들이 구호품 나눠주듯 주는 생수를 성수라고 믿는 것도, 앉은뱅이 환자가 일어서는 게 수몰지역 지정이 사탄과 연계되었다는 말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에도 마치 관련된 사실인 양 믿는 것도 모두 그렇다. 더구나 증거는 거짓을 포장하기 위해서도 사용되지만, 진실을 가릴 때도 사용된다. 극중에서 마을 사람들은 물론 가족들에게도 패악질을 일삼는 주인공 민철은 시종일관 진실을 말하는 유일한 인간이지만 그의 평소 행실이 ‘증거’가 되어 진실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경찰이 사기죄로 수배 중인 장로의 행적을 좇을 때 이를 이용해 경찰을 돌려보낸 목사처럼, 증거는 거짓을 숨길 때도, 진실을 숨길 때도 유용하게 쓰인다.


<지옥>(2021)에서도 교주 정진수는 자기 자신이 지옥에 간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증거’로써 새진리회라는 시스템을 만들고 그 속에 숨는다. 그런데 이처럼 시스템은 어떤 집단을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증거를 만들고 진실을 호도하기도 하지만 구체적인 의도를 가지고 모인 특수집단이 아닌 불특정 다수인 대중들이 스스로 관념의 방어 체계를 구체화 시킨 것도 있다. 예컨대 박정자가 싱글 맘이라거나, 정진수가 고아라는 사실은 불현듯 찾아오는 우연한 사건, 지옥의 사신들이 떨어질 때 나는 소리처럼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가슴이 철렁하는 불운한 사건이다. 하지만 박정자의 죄를 추궁하는 신에서처럼 남편이 없다는 것, 부모가 없다는 것과 같은 일들은 그 자체로 피할 수 없는 불행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 때문에 이어지는 편견이나 일련의 적의들은 마치 새진리회처럼 자연적인 사건과는 다른 인위적인 시스템에 의해 작동된다. 그래서 같은 공통분모를 가진 이 두 가지 형태의 시스템은 새진리회와 그 광신도 집단인 ‘화살촉’의 관계처럼 원래 같은 톱니바퀴를 지니고 있었다는 듯이 잘 맞물려 돌아간다. 마치 나치와 나치당원, 파시즘과 파시스트의 관계처럼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나치와 파시즘이 그러했듯이, 처음에는 문제를 해결하는 듯 보였던 어떤 사상이 점차로 그 자체로 문제를 일으키는 원흉이 되고 거기에 매달렸던 모든 이들은 사상에 굴종해 차츰 인간성을 버리고 그 자신이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재앙적인 존재가 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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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의 왕>(2011)


말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괴물이 되는 자들


애니메이션 영화 <돼지의 왕>(2011)에서 종석과 경민이 다니던 학교는 상하 계급이 나뉜 하나의 완전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학년 전체를 통솔하는 중간 관리자가 있고, 각 반을 통제하는 말단 관리자가 있으며, 그 관리를 받는 대중인 학생들과 시스템이 스스로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무력을 증명할 희생양 집단이 있다. ‘원활한 학교생활’이라는 삶을 위해서 학생들은 시스템이 요구하는 굴종의 증표로써 종석이 혐오하는 소위 ‘비굴한 웃음’을 배워나가고 심지어 경민도 말단 관리자들 앞에서 그 웃음을 보이고 말지만, 시스템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철이의 등장으로 시스템에는 작은 균열이 생긴다. 종석과 경민이 괴롭힘을 당할 때마다 나타나 무력으로 시스템을 응징하는 철이는 배만 부르면 만족하는 돼지들처럼 일신의 위협이 없으면 안주하는 교실의 의인화된 돼지들과는 성격이 다른 ‘돼지의 왕’이 된다. 결국, 철이는 학교라는 시스템의 최정상에 올라가 시스템의 중심부를 해체 해 나가지만 학교의 학생들이 만든 시스템보다도 더 큰 시스템이 나타나 철이의 인생을 송두리째 뽑아버린다. 퇴학 이후 방황하던 철이는 종석과 경민에게 여전히 시스템 안에서 잘 살아가고 있는 학생들이 ‘만족’하지 못하도록 정신적인 충격이라도 주기 위해 공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꺼내놓지만, 어머니의 고통을 본 뒤로 생각을 고쳐먹는다. 하지만 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리지 않으려던 철이를 종석은 밀쳐버리고, 먼 훗날 성인이 된 경민이 같은 자리에서 종석에게 그날 자신은 ‘괴물을 보았다’며 과거를 추궁한다.


극중 종석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실은 그 역시 ‘철이’라는 변증법적 대립항의 시스템에 올라타 있는 상태였다. 언제까지나 시스템에 저항하고 굴종의 웃음을 짓지 않게 만들어주는 철이라는 사상은 종석을 한 개인으로서 철이를 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의 한 요소로서 보게 만든다. 즉, 어떤 시스템이 작동하는 순간 인간은 그 자신의 삶을 위해 헌신하는 게 아니라, 말에 불과한 이념과 사상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기 시작한다. 본디 인간을 구출하기 위해 고안된 도구였기에 사람들은 시스템이 자신을 구조해줄 것이라 기대한다. 하지만 시스템 자체가 위험에 처했을 때는 어떠한가? 사람들은 시스템이 건재해야 자신도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에 자신을 내팽개쳐두고 우선 시스템을 살리는데 자기를 투신한다.


<사이비>(2013)에서도 처음에는 사이비 단체가 들이닥쳐 시스템을 작동시키기 위해 진실을 가리고 증거를 만들어 내는 등 작업을 펼치지만, 극의 후반에 들어서는 그런 작업이 전혀 필요하지 않게 된다. 지적장애인인 성호는 ‘천국으로 보내주는’ 반석 교회라는 시스템을 지키기 위해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다. 민철의 딸인 영선 역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가치를 지지해주는 반석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 매춘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방관자로서, 죽는 순간까지 천국에 간다고 믿었던 아내의 영면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민철이 피를 흘리며 이단 종교의 폐해를 외침에도 싸움을 거절했던 슈퍼마켓 주인 칠성의 경우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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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려드는 주문을 맞추기 위해 자식을 튀겨버린 치킨집 사장 *<사랑은 단백질>(2008)


능동적이건 수동적이건 간에 시스템의 위기 앞에서 시스템의 도움을 받고자 했던 이들이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으면서 결국 그 자신들이 타자에게 재앙이 된다. 그리고 이들은 연상호 감독의 작품 속에서 묘사되듯이 인간 기저에 깔린 욕망을 추구하는 동물들도 아닌 괴물로 표현된다. 인간의 행복은 그 자신이 인간의 모습을 할 때 얻을 수 있다. 이미 괴물이 되어버린 이후에 어떤 구원과 삶이 기다리고 있는가? <지옥 : part 2>(2004)에서 주인공이 빠져버린 지옥처럼 그들에게는 파괴된 삶과 맹목적인 의지만이 남게 된다. 그뿐만이 아니라 시스템의 위기 앞에서 그들은 종종 <사랑은 단백질>(2008)에서 자기 자식을 치킨으로 튀겨버린 치킨집 사장처럼 더 시스템에 의존해봐야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넘어버리고 만다. 삶의 목적과 이유를 모두 잃어버린 채 모든 것을 바쳐 지킨 시스템만이 덩그러니 남은 상태. <지옥>(2021)에서 화살촉의 대변인 역할을 했던 동욱이 극 후반 폐인처럼 살아가다 자신이 ‘신의 메시아’가 되었다는 말에 기뻐하며 주인공들을 위기로 몰아넣는 것처럼 이미 괴물의 영역에 진입한 이들이 떠받드는 시스템은 더 이상 시스템이 아니라 인간에게 새로운 위협이자 또 다른 해법을 요구하는 ‘극복해야 할 무엇’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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