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영화를 넘어 문화 아이콘이 된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2003)
넷플릭스 신작 영화 <길복순>(2023)을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는 이 영화가 가장 적극적으로 오마주 하고 있는 한 작품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 <킬 빌> 2부작은 최강 암살자 집단 '데들리 바이퍼스'의 최강자 베아트릭스 키도가 그 수장인 '빌'을 죽이러 가는 내용으로 꾸려지는데, 여기서 당신이 '왜 키도가 빌을 죽이러 가냐'라는 질문을 던졌다면 이미 정답에 가깝게 왔다. 이 질문 하나로도 <길복순>이 재미없는 이유를, 당신은 굳이 리뷰를 보지 않아도 스스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영화 <킬 빌>(2003)에서 주인공 키도는 암살단을 탈퇴하고 평범한 남자와 결혼하려다가 결혼식장에서 빌에게 총을 맞는다. 암살단원들이 기관총을 난사하며 식장에 난입하고, 키도는 임신한 상태로 긴 혼수상태에 빠져 병원에서 몹쓸 짓도 당하다가 결국 깨어나 빌과 암살단원들을 찾아 나서는데, 이 여자의 살인의 이유에 대해서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이 영화의 동력은 너무할 정도로 단순하지만 그 단순함이 두 편에 걸친 이야기를 공백 없이 메꾼다.
본격적으로 '살인의 이유'에 대해 질문하는 영화 <올드 보이>(2003)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2003) 같은 영화는 또 어떤가. 이 영화는 아예 주인공이 '살인의 이유'를 찾는 일로 영화를 움직인다.
주인공 오대수는 십수 년 동안 영문도 모른 채 납치되어 하루 세끼 군만두만 먹으며 복수를 다짐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거짓말처럼 풀려난 뒤, 결국 자신을 가둔 사람이자 모든 사건의 원흉인 이우진을 찾아낸다. 그러나 이우진이 자기를 가둔 이유를 도통 말해주지 않는 바람에 오대수는 원수를 눈앞에 두고도 다시 '이우진을 왜 죽여야 하는지'를 찾아 헤매게 된다.
그런데 <길복순>의 길복순에게 처음부터 살인의 이유는 명확하지가 않다. 화려한 인생과 돈 때문에 살인을 벌이는 건지, 아니면 하나뿐인 딸을 위해서 살인을 벌이는 건지, 그도 아니라면 과거에 지옥 같은 생활을 청산하게 해 준 리더 차민규에 대한 사랑으로 살인을 벌이는 건지, 타고난 살인마여서 살인을 벌이는 건지 어느 하나를 정하지 않고 이것저것 다 넣다 보니 길복순이란 캐릭터는 온갖 이유로 살인을 벌이는 난잡한 살인마가 되었다. 물론 이런 이유들을 다 유기적으로 엮을 수 있다면 훌륭하겠지만 그렇지도 않다.
그 스스로가 이미 <007> 시리즈의 '젠틀맨 스파이'를 숭배한다고 밝히지만, 그럼에도 '내 식대로 젠틀맨 스파이'가 뭔지 제대로 보여준 매튜 본 감독의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2015)
이 영화가 길복순의 상사인 차민규를 통해서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2015)의 광신도 난투신을 오마주 하고 있으니 이번엔 차민규의 입장에서 <킹스맨>을 예로 들어보자.
스파이 조직인 '킹스맨'의 에이전트들 역시 살인을 벌이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그들이 살인을 벌이는 이유는 해리 하트가 에그시를 킹스맨 본부로 데려가는 장면에서 명확하게 밝혀진다. '현대판 기사'로서 명망 있는 왕가와 권력자들의 돈을 모아 정의를 위해 무력을 사용하자는 것. 킹스맨 에이전트들이 살인을 저지를 때도 '우아하고 젠틀하게' 행동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게 결국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요소를 하나로 합치는 영화적 아이러니를 낳게 되고 그 아이러니가 <킹스맨> 영화의 가장 큰 무기이자 매력이 된다.
"우린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살인은 이제 글로벌 사업이 되었고 우린 정당한 대우를 받았죠. 회사도 없는 무직자나 아마추어들이 단돈 몇백에 어린아이까지 죽여가며 우리의 가치를 낮추기 전까지는"라고 차민규는 말했으나 그의 최후는 자부심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길복순>의 차민규와 그의 회사 MK도 처음엔 그럴싸한 '살인의 이유'를 들고 온다. 전후사정은 생략하더라도 어쨌거나 '글로벌 사업'이 된 살인청부업을 자부심을 느낄만한 일로 승화시켜 보자거나, 자기 세력이 아닌 경쟁자들을 보다 합리적으로 죽이기 위해서 '룰'을 세우기로 한다. 그런데 극이 진행되면 될수록 이 룰은 차민규가 던진 화두를 지키기 위해서 쓰이는 게 아니라 산으로 가는 영화의 맥락을 고쳐 쓰는데만 집중된다.
실제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살수들은 외부세계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인정을 받는다거나 자부심을 느낄만한 사건을 겪지 않는다. 그저 뉴스에 나온 몇몇 사건들을 자기들의 작품이라며 저들끼리 시시덕거리거나 회사 내부에서나 'A급'이 된다던가 소위 '취업'이 되어 소속을 갖게 된다던가 하는 일에 목을 매는 수준인데, 그게 결국 돈 때문이라고 한다면 인물들이 돈 때문에 무슨 어려움을 겪고 그게 왜 필요한지에 대한 설명도 충분하지 않다. 그나마 길복순의 서포터이자 B급 살수인 희성의 경우는 아버지의 치료비가 필요하며 생활 수준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이미지로 등장하는데, 그런 정보는 '입사만 하면 팔자 핀다'는 주변 인물들의 태도와 모순되고 영화의 개연성을 파괴하는 축으로 작동한다.
주인공이자 A급 살수인 길복순 역시 자기 딸의 교육을 위해서 철저한 이중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고(세계 최강의 A급 살수가 십대 딸한테 무기와 가짜 여권을 들킴), 살수들이 바글바글한 회사에서 서로에 대한 정보가 수시로 교환되는 그런 환경 속에 대놓고 살수 생활을 이어가는데도 인턴조차 금방 찾아올 수 있는 고정된 거주지에 떡하니 자리 잡았다는 황당한 설정을 갖고 있는 건 매한가지다. 일단 그런 사소한 문제(사소하진 않지만 다른 문제가 크니까)는 밀어두더라도, '딸의 교육을 위해서 살인을 한다'는 뉘앙스도 갈수록 모호하게 흩트려 놓는다.
이유가 없다. 이유가 없으니까 결국에는 길복순이 딸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따르던 인턴의 복수를 위해서 차민규를 찾아가는 뜬금없는 그림이 결말부에 그려지는데, 사태가 이 지경에 오도록 딸이 지나치게 안전한 것도 헛웃음이 나오게 할 뿐더러 <오션스 일레븐>에서 오션이 빼앗긴 애인을 되찾기 위해 몰래카메라를 이용했던 그 신을 오마주한 장면(이쯤 하면 오마주인지 좋은 영화를 난잡하게 베껴놓은 것인지 알 수가 없으나)에서는 또다시 딸을 가지고 길복순을 흔들면서 누구를 위한 복수이며 살인인지 오락가락하며 영화의 마지막 맥락마저 붕괴시킨다.
마침내 빌을 찾아낸 키도가 '품격 있는 싸움'을 제안하는 빌의 이야기를 듣는 장면
길복순이나 차민규나 서로에게 총을 겨누게 된 결말부, 마치 <킬 빌> 2부의 마지막 장면을 연상시키게 하는 그 대목에서 이미 '살인의 이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질 수 없는 여자를 가지기 위해 자기모순을 반복한 남자의 비참한 최후를 그리는 것도 아니고, 길복순에 대한 질투심에 찌들어 자신을 곤경에 처하게 만든 동생의 죽음이라는 헐거운 이유가 차민규를 길복순에게 총부리를 겨누게 하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처음 차민규가 이야기했던 '살수의 자부심을 지키기 위해서' 같은 이유는 발견할 수가 있는가.
이렇게 해석하려고 해도 돌부리에 치여 넘어지고, 저렇게 보려고 해도 말이 안 되는 이 영화는 다른 의미로 대단하긴 하다. 지금 이 비평에서는 '살인의 이유'라는 측면에만 집중해서 미처 다 언급하지 못했을 뿐, 사건에 유기성을 부여하지도 않고 대체 왜 등장했는지도 모를 정치인과 그의 아들, 딸의 학교 이야기 같은 군더더기처럼 보기에 고통스러운 지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사실 <길복순>이 이 지경이 된 데에는 역시나 '욕심'이 가장 큰 화근이 되었을 것이다. 드라마도 되고 싶고, 액션도 되고 싶은데, 사회적 메시지까지 던지고 싶으니까 온갖 에피소드가 어울리지 못하고 잡탕처럼 널브러지는 것이다. 그러니 킬러 영화가 살인의 이유도 제대로 정의하지 못하고 스스로 자멸하는 이상한 내러티브를 가지는데, 차라리 너무 담고 싶은 게 많아서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면 그토록 닮고 싶어하던 <킬 빌>처럼 2부, 3부작으로 나눴으면 더 좋을 일이다(그런데 이게 2부작이라면 정말 소름 돋을 것 같다). 그도 부족하면 요즘 넷플릭스에서 드라마 감독으로도 활동 중인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 감독, <지옥>의 연상호 감독처럼 아예 드라마를 만들어도 되지 않았을까. 분명히 괜찮은 소재였고 흥미를 끈 것은 사실이니 말이다.
물론 최후의 반론으로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건 액션 영화야. 눈이 즐거우면 그만 아냐'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 액션이라는 것조차 배우들이 서로 다칠까 봐 힘을 빼는 게 눈에 보일만큼, '살랑이는' 이런 봄바람 액션에 눈이 즐거울 사람이 있을지 과연 의문이다. 박훈정 감독의 <마녀>에서 연약하지만 강력한 킬러 '마녀'들이 보여준 액션과 비교하면 그 차이는 명확하다. 그리고 정작 이 영화에서 그토록 따라 하고 싶었던 <킬 빌>이나 <킹스맨>에 등장하는 액션 신을 함께 놓고 봐도 느긋하게 소중히 상대를 타격하는 그 절망적인 액션은 더이상 설명할 길이 없다. 그렇다고 오마주(가 맞나?)로 범벅된 이 영화가 독창성을 가진다고 하기도 어렵고.
'길복순'의 '길'로 시작하지만 결국 이 영화에는 길이 없다. 명예롭게 잠들어 있던 명작들의 멱살까지 '무딘 칼날'에 꿰어놓고 저승으로 떠나는 이 영화의 마지막을, 나는 이렇게 보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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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진
-영화 <킬 빌>(2003) 중
-영화 <킬 빌 : 2부>(2004) 중
-영화 <올드 보이>(2003) 중
-영화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2015) 중
-넷플릭스 영화 <길복순>(2023)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