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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아시스 Mar 24. 2017

바람과 태양의 나라

-편견이 들어 있는 9일간의 필리핀 읽기

    

혁명 그리고 체게바라


나는 어린 시절부터 세계사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중학교 때 세계사 점수는 나의 관심을 반영하듯 늘 비등점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관심과는 달리 제대로 나가 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런 취향을 반영하듯 어린 시절부터 뉴스로 듣는 세상의 소식은 가볍지 않게 넘기고 있었는데,
그중 필리핀은 마르코스대통령의 독재를 뒤집어 놓은 '피플파워'의 힘이 돋보였던 필리핀 혁명이 내 기억의 메모리에 담겨 있다. 마르코스 대통령의 부인 이멜다의 수천 켤레 구두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마르코스의 정적이었던 아키노가 암살되면서 시작되었던 필리핀 혁명.
그 후 아키노의 부인 코라손 아키노, 배우 출신의 대통령 에스트라다, 그리고 최근의 아로요 대통령이 내 기억의 그물망에 파닥거리는 수준이 필리핀을 알고 있는 전부였다.
그리고 몇몇 대통령은 부패를 반복하고 다시 물러나고 그래도 마르코스만큼 냄새나는 독재는 안 하고 있어서 정치는 안정되어 있겠구나 생각했다.
가끔 필리핀 공산반군이 마닐라 공항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었고 그 정도의 잡음 정도는 있겠지 하는 게 내 상식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현장에 와서 나는 혁명을 생각했다.
혁명의 방식을 달가워하지 않는 내가
급할수록 돌아가고
목이 마를수록 쉬었다 마셔라.
그리고 순수하되 순진하지는 말라.
그리고 혁명하려면 제대로 싸움의 기술을 배우고 들이대라.
그래서 열정으로만 승부를 거는 혁명의 방식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내가
체게바라 형님과 필리핀 공산반군을 이해하게 되었다.

중세, 식민지의 기억

독재자 마르코스를 몰아낸 혁명은 그저 가문이 바뀔 뿐인 혁명이었다.
몇 백 년간 식민지였던 필리핀은 튼튼한 가문만 살아남았다. 아마 우리의 친일파들처럼,
혁명의 중심이었던 시민은 한 가문을 몰아내는 용병이었을 뿐, 진정한 민주주의와 평등의 경험이 없는 식민의 나라는 식민지의 기억을 지우지 못하고 살고 있었다.
정치와 경제는 가문의 소유고
이들이 필리핀 서민을 쥐락펴락 하는 수단은 자본주의 시스템.
아주 조악한 자본주의.
이자가 이자를 낳는 고리대가 서민들의 허리를 더 가늘게 하고
두마게티의 리플자 업주는 점원들을 5개월마다 가지치기한다.
6개월이 되면 정규직이 되니까.
공항경찰들마저 달러 환전을 하는 부패의 천국
대통령은 퇴임할 때 몇 천억을 가져가는 게 화두다.
그리고 중세의 성채처럼 높은 담장을 가진 지방의 유력한 가문들은 봉건영주처럼 사병을 소유하고 있다.

그래도 희망을,

희규샘 왈
「식민지의 기억에서 벗나지 못하는 동남아의 처지를 타개할 수 있는 글로벌 리더들이 우리 간디에서 나왔으면 좋겠다.
국제반은 그런 과정의 연장선상이고 사회적 기업 혹은 사회적 연대를 맺으면서 우리 친구들이 그런 가능성을 펼칠 수 있는 전진기지로 필리핀을 생각하고 있다.
최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 무하마드 유누스 총재를 읽고 있다. 나는 그런 사람은 못되지만 그런 사람이 나올 수 있는 조건을 준비해주고 싶다. 그리고 유누스처럼 어려운 이웃들에게 깊은 연민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
멀리 있는 꿈이지만 그래도 우리 친구들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친구들이라고 생각하니 결코 멀리 있는 꿈이라는 생각이 안 들었다.



여행은 관계 맺기라는 또 다른 이름이다.


필리핀이 매력적인 이유 중의 첫 번째는 필리핀 사람들의 겸손함에 있다.
상대방을 편안하게 하는 하늘을 닮은 맑고 깊은 눈빛.
물론 겸손함은
'가난이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의 겸손일런지 모르지만
자본의 그늘에 휘둘리지 않는 그들의 심성이 너무 고와서
그 심성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다.
(우리도 한때는 겸손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어설픈 영어로 말을 걸더라도 결코 부담스러워하지 않은지라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내 어설픈 영어가 친구들을 만들었다.
아포섬에 갔다가 작은 쪽배에 의지해 돌아오는 바다 위에서
노스칼리지 다닌다는 샐던이라는 아포섬 출신의 여학생
수줍음 때문에 터번으로 입술을 가리고 뱃속을 긁는 모터소리 때문에
내 어설픈 영어가 퇴색해졌지만 언어 이상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아포섬 축제 때 학생들과 함께 오니 놀러 오라고 하니까 그런다고 수줍게 고개를 끄덕인다.
빽빽한 밀림처럼 승객들이 빼곡한 지프니(버스)에서도 나는 옆자리에 필리핀 친구들만 앉으면
무조건 반사처럼 말을 걸었다.
나의 어설픈 영어 실력은 마치 명절 때마다 재롱을 떠는 외국인의 서툰 옹알이처럼 들리는지
함께 하는 일행부터 필리핀 친구들까지도 즐거워한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무려 10시간을 기다려야 했던 마닐라 공항.
거기서 미국 캔자스시티로 돌아가는 조나단을 만났다.
그는 2주 전에 필리핀에 왔다. 나는 조나단과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야기를 하다가 식사 시간이 되어 빈털터리라는 조나단을 함께 데려가서 식사를 하다가 이틀 전에 필리핀 여자와 결혼했다는 조나단의 고백을 들었다. 그리고 조나단은 사진을 보여줬다.
비자 문제로 필리핀 아내를 데려갈 수 없어서 혼자 미국으로 돌아가는 중이라고,
인터넷 채팅으로 만난 지 4개월, 우리 일행은 깜짝 놀라고
그 친구랑 멜 주소와 집주소를 교환하고 내가 미국에 가면 미국 중부의 캔자스로 놀러 가겠다고
그리고 한국에 오면 금산에 놀러 오라고
본토발음의 미국 친구라 조금 버거웠지만
Again-Again-과 Slow-Slow를 양념으로 섞으면서
무려 4시간을 1형식과 2형식 문장으로 버티었다.
함께 간 일행들이 '영어가 고생한다'
그러나 '제일 빨리 회화가 되겠는 걸' 하며 나를 토닥인다.
하지만 나는 영어보다 사람이 더 좋다.
언어는 관계를 맺기 위한 사랑의 오작교다.
그리고 또 다른 깨달음.
영어는 지식이 아니라 교양이다.


흔들린다,


시퀴홀 섬에서 돌아오는 배는 몹시 흔들렸다.
나는 흔들리는 배의 생리를 알아서 2층으로 올라가 선채로 배가 흔들릴 때마다
다리를 폈다 오무렸다를 반복했다. 균형감각이 멀미를 잡을 수 있었다.
다리가 저렸지만 1시간을 버티어 낸 덕분에
점심에 먹은 음식물을 구경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1층 객실의자에 앉았던 일행들은 배에서 내리자마자 어지러움과 메스꺼움에
항구에 앉아 일어나지를 못했다.
거세게 따귀를 때리는 파도 때문에 창문은 파란 비닐로 덮여 있어
공기는 안 통하고 바깥을 볼 수가 없어 그들의 멀미는 더 심했다.
다시 아포로 가는 배안.
배는 시퀴홀에서 탔던 배보다 더 작았지만
바람과 태양이 우리를 껴안고
공룡의 피부 같은 파도는 매끈한 허리처럼 돌아가며 우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그런 흔들림이 속을 메슥거리게 하기보다는 우리에게 흔들림을 가르쳤다.
흔들림의 일부가 되었다.
어딘가로 떠난다는 건 잠시 두려움에 흔들리지만
그 흔들림이 이제는 즐겁다.
식민지의 현실을 반추하게 만드는 필리핀의 열악한 상황이 한편으로 안쓰러웠지만
그 안쓰러움이 내게는 숙제로 남았다.
그리고 다시 어딘가로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과 나가야만 하는 숙명.
짧은 9일간의 기록이지만 아주 강렬한 만남과 마주침이었다.
그리고 여행이 두려웠던 시골 촌놈이 인류를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우월감과 열등감
 
필리핀 가기 전에 만났던 동남아 친구들 혹은 시설에서 만나는 장애인을 만날 때마다
늘 표정에 신경 썼다. 자칫 내 언어와 행동이 우월감으로 비치지 않을까 조심스러워했다.
간혹 외국인 노동자를 차별하거나 착취하는 우리들 이웃들 소식을 들을 때마다
부끄러웠다.
필리핀에선 자칫하면 우월감에  빠지기 쉽다.
모든 조건들이 우리들의 우월감을 부추기는 요소들이다.
유럽이나 잘 사는 뭇 나라에 가면 상황은 반대다.
상대 나라 사람들의 몸짓이나 말 한마디에도 온갖 촉수를 곤두세운다.
주눅 들어서다.
이런 쓸모없는 우월감과 열등감이 관계를 막는 태도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비상식적인 차별과 불평등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우린 필리핀에서 우월감의 싹을 누르고 피부와 언어 그리고 자본을 뛰어넘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배운다.
그래도 열등감이 우월감보다는 인간에 대해 더 예의적이지 않는가
그리고 열등감 정도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배우는 친구들이라면 자연스럽게 지워지지 않을까.


반짝거리는,


필리핀에서 돌아온 나는,
약간의 설렘과 기대 때문에
아직도 마음이 반짝거린다.
필리핀의 햇살 때문일 게다.
그리고 파란 하늘처럼 깊은 눈을 가진 필리핀 친구들의 눈동자 때문일 게다.
작년에 영화 '맘마미아'를 보고 울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지중해의 맑은 햇살과 밝은 긍정의 기운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중해도 늘 가고 싶은 곳이었다.
축축한 기억과 마음을 햇살에 빳빳해질 정도로 말리고 싶었다.
그리고 뽀송뽀송하게 살고 싶다.
아포로 가는 배위에서
흔들리면서 보았던,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였던 물빛들은
그런 내 마음의 신호였다.


2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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