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3학년 다음 학교를 정하던 시기에 내가 생각했던 직업은 조선소 기술자였다. 그래서 공고를 가려고 했다. 하지만 큰형님은 조선소 기술자의 꿈을 막았다. 인문계로 가길 원했다. 지금도 왜 그곳으로 가라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큰 형님은 내 인문학적인 성향을 눈치챘던 걸까? 하지만 나는 큰형님의 학력 콤플렉스 덕택에 인문계로 가게 되고 대학을 나오고 지금의 내가 되었다고 짐작하고 있다. 큰형님은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자전거 수리점에서 보조로 일하다 이발소로 옮겨서 수 십 년 이발사를 하셨다. 형님 덕분에 인문계 고등학교를 들어갔다. 중3때부터 나는 미래가 많이 두려운 겁이 많은 소년이었다. 어린 시절의 가난이 생존에 대한 강박으로 치환되어 생존을 위해 공부만 하는 겁쟁이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공업고등학교를 가서 안전하게 조선소 기술자가 되려고 했지만 형님 덕분에 인문계 고등학교를 마지못해 가게 되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도 2학년 때까지도 나는 여전히 미래를 두려워하는 겁먹은 강아지였다. 그런 와중에 불안 대문에 쪼라라진 나를 흔든 건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었다. 겁먹은 강아지처럼 살던 내게 처음으로 ‘너는 뭐하니?’라는 질문을 던진 소설이었다. 그 이후 내 삶은 뒤바뀌었다. 모의고사가 끝나면 소설 한권을 읽었고 틈만 나면 습작을 했다. 습작의 내용은 시스템의 압박에 짜그러진 청춘의 하소연이 대부분이었다. 소리 지르고 싶었다. 글을 통해 토해냈다. 대학시험을 봤지만 녹녹치 않았다. 재수를 했다. 재수를 하기 전 3개월 동안 책만 읽었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을 들어갔다. 그곳에서 책을 읽고 군대에 가서도 50권 정도의 책을 읽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내가 읽은 책의 내용대로 살려고 애썼다. 초등학교 5학년 읽었던 간디의 비폭력 정신과 체게바라의 명문장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를 현실에서 실천하려 몸부림치고 결국 나중에 읽은 스콧 니어링의 자급자족에 대한 실천을 하려고 대안학교에 들어왔다.
다시 중 3때로 들어가서 복기해 본다. 내가 공업고등학교를 선택했으면 나는 나중 조선소 기술자가 되었을 것이다. 좋은 아파트에 토끼 같은 자식과 예쁜 아내가 부록으로 딸려 올 것이다. 그럼 지금 나는 무엇이 되어 있을까? 내가 가지고 있던 존재에 대한 불안은 연봉 1억의 월급으로 깨끗이 청소할 수 있었을까?
내가 불안을 넘어 선 건 아니 불안을 평범하게 보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마흔이 되어서야 가능했다. 그 배경에는 내 불안의 핵심을 짚어 준 심리적 통찰의 도움이 컸다.
나중에 형님에게 물어보려고 한다. 나를 인문계로 가게 한 건 형님의 통찰인지 아님 당신의 대리만족을 위해서인지..
아니 그 당시 형님의 선택을 거부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고 2 때 내게 불꽃을 튀게 해준 ‘젊은 배르테르의 슬픔’처럼 영감의 매개체를 만나 이 자리에 왔을 것이다.
왜냐구? 나는 생각한다, 고로 뜨겁게 존재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