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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김지영이다

by 오아시스


사람은 못되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자

-홍상수 영화 '생활의 발견 '대사


'생활의 발견'은 미숙한 주인공이 펼치는 욕망의 오딧세이처럼 보입니다. 주인공 경수에게 선배가 건네는 대사는 홍상수의 단골 남성캐릭터를 압축한 대사입니다. 강한 척하지만, 그래서 권력을 쥐어야만, 이빨을 드러낼 수 있는 권력을 쥐어야만, 조금 어깨 건달이 되는 이 남자의 숙명은 기울어진 젠더의 지형에서 남자의 본질이라고 합리화 시키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동안 영화 혹은 드라마에서 다루는 권력자들을 수발하는 건 여성의 몫이었고 전쟁의 패전 결과물에도 여성들이 공물의 대상이었습니다. 재벌회장의 며느리나 기업가의 아내가 되는 연예인들의 정략적인 결혼 또한 남성들이 그토록 성취하고 싶은 권력의 부산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연예인들 혹은 현모양처를 원하거나 남성의 편이 되는 할머니들을 여성의 적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몇 천 년 동안 여성이 스스로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지 못하게 하는 참혹한 현장에서 어느 누가 프로메테우스처럼 불을 훔쳐 올 수 있었을까요? 아주 간혹 허난설헌 혹은 *에밀리 데이비슨이 있었습니다. 아무도 나서기 힘든 환경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남성의 권력 아래에 들어가 남성의 프락치가 되어 남성의 권력에 대항하는 여성들을 밀어 내었습니다. (스위스 영화 ‘거룩한 분노’에선 참정권을 주장하는 여성단체를 거세하려는 백골단은 부녀회장의 역할을 맡은 중년여성이다.) 수천 년 남성 식민의 역사에 버텨낼 수 있는 맷집을 가진 이들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더 언급되어야 하고 왜곡 된 젠더의 역사를 생각하면 지금은 조금 더 여성의 고백을 들어야하는 ‘사죄의 시간’입니다. (최근 정부 주도의 여성 평등 주간이 양성평등 주간으로 바뀌었다. 아직 시기상조다.)

서산여중 다녀오는 장거리 버스에서 ‘82년 김지영’을 다 읽었습니다. 한편의 소설로 완성한 대한민국 여성 생태 보고서였습니다. 그 당시를 경험한 제게는 거칠었던 젠더지형을 순하게 표현한 소설로 보였는데 일부 남성들에겐 그렇지 않았나 봅니다.

“김지영 이제 걔랑 완전히 끝난 것 같던데?”

예전부터 김지영한테 관심 있지 않았느냐, 관심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잘해 봐라, 우리가 도와 주겠다, 하는 여러 목소리들이 계속 들렸다. -중략-

“아, 됐어, 씹다 버린 껌을 누가 씹냐?”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지만 남에게 억지로 권하지는 않고 후배들에게 밥을 잘 사주지만 되도록 함께 먹지는 않는 선배였다.

-82년생 김지영' 소설에서 인용

최근 버닝썬과 장자연 그리고김학의 정준영까지 남자들의 부끄러운 민낯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남성들의 음침한 세계로 들어가 보면 여성은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라 성적 대상의 제물이었습니다.

요즘 가끔씩 성평등 강의를 갈 때마다 사죄를 하고 시작합니다. 밤 11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돌아오던 고3 시절, 여동생한테 당연하다는 듯이 라면을 끓여 오라고 했던 금치산자였습니다.

영화 ‘거룩한 분노’는 직접 민주정치의 상징으로 알려진 스위스에서 1972년까지 여성 참정권을 인정하지 않았던 몰상식의 세상을 기록한 영화입니다. 프랑스 혁명은 시민에게 자유를 돌려 줬지만 그 자유는 남성에게만 해당 되었습니다.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 될 때까지 시간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스위스는 1985년이 되어서야 모든 주에서 여성 참정권이 인정되었다. 그리고 2015년 사우디아라비아가 마지막에서 두 번째였다. 인구 300명의 바티칸 시티가 아직 참정권의 사각지대로 남아 있다.) 영화 ‘거룩한 분노’가 더 의미 있던 건 참정권의 문제만 아니라 여성의 몸까지 언급했던 점입니다. 성 워크샵을 통해 그동안 불경의 대상이 되었던 여성의 몸을 수용하면서 여성이 몸의 주체가 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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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녀와 잤을까?’ 성인지 감수성이 제로인 시대에 가능했던 영화 제목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영화들은 끝까지 보기 힘든 영화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영화의 주인공은 남성이 대부분이었기에 여성의 역할은 장식용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간만에 여성이 주인공인 ‘82년생 김지영’이 영화로 제작되면서 많이 시끄러웠습니다. 개봉하지도 않았는데 평점 테러까지 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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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지금의 페미니즘 운동이 여전히 진영논리로 보이는 분들에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 모두가 김지영 입니다. 화력발전소 컨베이어 벨트의 제물이 되어 버린 청년처럼, 우리 모두 김용균 입니다. 1955년 3월 2일, 백인 좌석에 앉았던 이유로 수갑을 찬 채 쫒겨 났던 42살 흑인 여성처럼. 우리 모두 로자 파크스 입니다. 단순히 여성과 남성의 헤게모니가 아니라 불평등의 관점으로 풀어간다면 더 이상 논쟁은 필요 없습니다. 더 나아가 ‘나는 너’가 되는 공감의 카르텔이 형성되지 않으면 소수자는 영원히 소수자가 되고 불평등의 역사는 대물림 될 뿐입니다.


*에밀리 데이비슨: 1920년 대 여성 참정권운동가. ‘여성 참정권’을 외치며 달리는 여왕의 마차에 뛰어 들었다. 최근 영화 ‘서프러제트’로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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