빔 벤더스의 영화 <파리, 텍사스>는 길 위에서 시작해서 길 위에서 끝나는 영화다.
초반 길 위를 헤매던 주인공 트레비스가 동생의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영화 러닝 타임의 1/3을 길이 차지한다. 공교롭게도 프로덕션 이름도 로드무비 필름이다.
‘길’을 소재로 한 영화들은 구도자의 아우라가 나온다. 요즘 ‘길’은 전국 지자체의 얼굴마담이 되어 여행자들을 꾀고 있다. 그리고 ‘산티아고’는 걷기 여행의 최종 목적지가 되었다.
‘길’은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아우라가 느껴진다. ‘길’에는 자기 삶을 되돌아보라는 주문과 또는 욕망을 비우고 떠나라는 사이렌의 음성이 들린다. 영화 ‘파리, 텍사스’는 느린 보폭으로 일관하는 카메라와 주인공 트레비스의 주름진 표정과 눈빛, 그리고 빔 벤더스의 음악 동료 라이 쿠더의 음악이 결합해 제대로 무게 중심을 잡는다.
주인공 트레비스는 어린 아내를 맞이해서 지극정성을 다한다. 심지어 어린 아내와 함께 있고 싶어 직장까지 그만둔다, 하지만 차츰 어린 아내가 미더워지기 시작하고 의심까지 한다. 이런 남편의 태도에 어린 아내는 버티기 힘겹다.
→ 이제하의 동명 소설을 영화로 만들었다. 80년대 겨울 공화국의 음울한 풍경을 은유적으로 풀어놨다.
스무 살 무렵 다녔던 시골 교회엔 내 또래의 어린 집사님 두 분이 있었다. 한 분은 남편과 눈이 맞아 17살 정도의 나이에 사랑이 명령하는 대로 사내아이 둘을 낳고 시골에 정착했다. 그리고 나보다 3살 정도 많은 또 한 분은 남루한 가계를 메꾸기 위해 면 소재지의 넉넉한 철물점에 시집가서 아들을 낳을 때까지 4명의 남매를 갖게 되었다. 게다가 시어머니와 증조할머니까지 모셔야 하는 형국이었다. 20 대 초반엔 이분들과 힘을 합쳐 교회의 큰일 작은 일을 만들어나갔다. 하지만 시골 가는 일이 뜸해지고 나중에 알게 된 두 분의 근황은 어지러웠다. 첫 번째 집사님은 다른 동네의 남정네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갔다. 그리도 두 번째 집사님은 도시의 남자와 눈이 맞았다는 소문이 들렸고 결국엔 4명의 자녀를 데리고 도시로 나왔다. 철물점을 배경으로 딴딴하게 버틸 것만 같았던 그녀의 남편은 어느 소읍의 다방 아가씨와 산다는 이야기가 들렸고 남았던 재산은 공중분해 되었다.
트레비스의 젊은 아내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임신하고 아이를 낳았지만, 자식은 그녀에게는 투기 부리는 남편 사이를 억지로 봉합시키는 불편한 대상이었다. 늦게 돌아온 아내를 난로에 묶어 놓고 잠든 어느 날 밤, 아내는 불을 지르고 나간다. 불기운에 놀라 일어난 남편은 집을 뛰쳐나와 4일 동안 무작정 달린다. 그리고 4년을 걸었다. 결국엔 몸의 물기운이 말라 쓰러졌다. 트래비스의 동생이 그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가는 중에도 그는 아직 길을 다 걷지 못했는지 가끔 동행 길을 벗어나려 하고 트레비스는 자신이 걸어 온 길을 바라본다. 그러자 동생은 말한다. ‘길 위에 아무것도 없다. 부질없다’ 하지만 트레비스는 다시 길 밖의 일상이 불편하다. 그에게 남아 있는 집착과 욕망이 두려울 뿐이다. 집착과 욕망 혹은 추억의 은유를 보여주는 빨간색은 첫 장면 트래비스가 쓰고 있는 빨간 모자에서 시작해서 다시 아내를 만났을 때 아내가 입고 있는 빨간 드레스까지 이어진다. 집에 돌아오는 시퀀스의 비중이 높았던 건 트레비스의 마음 상태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트레비스는 아직도 길이 목마르다. 그리고 4년을 느리게 살아 온 그에게 비행기는 너무 빨라서 4년의 침묵이 따라오지 못할까 봐 출발하려고 하던 비행기마저 멈추게 하고 만다.
어린 시절 종종 이웃집에 살던 누구 엄마들이 어두운 밤에 가출하고 돌아오지 않는다는 소문을 듣곤 했다. 아니 실제로 종종 그랬다. 남편만 철석같이 믿고 용감하게 따라온 여인들이 자기 뒤통수를 치고 말았다고 깨닫는 건 남성 위주로 돌아가는 시골의 끈적한 공기를 느끼고부터다. 새참으로 다방 아가씨가 커피 배달을 하고 겨울 농한기에는 다방 소파에 퍼질러 앉아 기둥서방 행세를 하고 다니는 풍경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여인들이 남자의 고향으로 유배 가는 형식이다. 생면부지의 땅에 사랑의 힘으로 이주를 선택했지만 살아보니 유배지나 다름없었다. 무뚝뚝한 초록색이나 밤의 침묵마저 여인의 편이 아니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배우자는 유배지의 여인을 돌보지 않고 고향의 텃밭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결혼마저 남자의 땅으로 가는데 명절마저 시댁이 첫 번째 회합의 장소다. 온갖 뒤치다꺼리 끝내고 그나마 배우자가 배려해서 겨우겨우 여인의 고향으로 가면 가족의 전체 구성원은 볼 수 없고 자매들만 보는 형국이다.
동생의 집으로 돌아온 트래비스는 나름 현실에 적응하려고 한다. 하지만 트레비스의 아내 앤이 사는 곳을 알게 되면서 아들 헌터와 엄마를 찾으러 떠난다. 앤은 집을 뛰쳐 나온 후 ‘자신의 공허함을 메꾸기 위해 애를 이용할 거 같아서’ 남편의 동생한테 애를 맡기고 핍쇼를 하는 술집에서 일하게 된다. 그곳에서 앤은 남편의 목소리처럼 들리는 환청을 듣게 되고 결국엔 남편이 찾아왔음을 알게 된다. 트레비스만 거울로 앤을 바라볼 수 있지만, 그는 제대로 응시하지 못한다. 트레비스는 앤에게 너무 가혹했었다. 그래서 마주 보지 못하고 뒤돌아서서 고해성사처럼 고백한다.
어린 시절 가출했던 엄마들에게 시골은 ‘마음의 감옥’이기도 했지만 ‘육체의 감옥’이기도 했다. 남자의 텃밭에서 남자들은 마음과 육체의 경계를 편안하게 넘어 다녔지만, 여인들은 CCTV 같은 소문의 벽에 갇혀 살 수밖에 없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안개마을>(이문열의 <익명의 섬>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에는 육체의 감옥에 갇힌 여인들의 구원자로 ‘깨철’이란 바보 총각이 나온다. ‘안개마을’이란 제목조차 윤리가 작동되지 않고 혼란스러운 안개의 상징적인 의미가 느껴진다.
몇 년 전 21살에 재력이 있는 남편과 결혼했던 분의 한풀이를 듣게 되었다. 어린 시절 여자 집사님들이 겹쳤다. 그리고 그녀들은 떠났지만, 이분은 아직도 남편 옆에 남아 20년마다 한 번씩 결혼해야 한다는 진보주의자가 되어버렸다. 제대로 판단이 되지 않는 나이에 선택한 결혼 생활이 지옥이었다는 의미가 전달되는데 결국에 남편 덕에 자기도 사람이 되었다고 윤리적인 마무리를 하고 말았다. 아울러 25년 동안 남편을 버티게 한 건 자식과 종교가 한몫했다고 덧붙인다. (최근에 남편의 외도에 충격을 받아 상담 치료를 받고 있다는 이분의 소식을 듣게 되었고 결국엔 헤어졌다고 한다.)
트레비스는 아직 남편이 그립다는 앤의 고백을 듣고도 꿈적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길을 떠난다. 그는 아직도 아내 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자신이 없다. 나는 종종 젊은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결혼이 의무가 아니라 선택이라고 역설한다. 특히 철들어서 결혼했으면 좋겠다고 권유한다. ‘애 낳으면 철들어’ 우리 사회에서 자두 듣게 되는 위험한(?) 문장이다. 물론 이른 나이에 가족을 감당하면서 철이 들긴 한다. 하지만 인격을 성숙하게 하는 도구로 결혼을 거론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결혼’은 시스템의 문제임에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신성불가침처럼 보인다. 아직도 명절마다 미혼 청년을 괴롭히는 결혼에 대한 맹신은 가족 이데올로기를 지키려는 도그마로 보인다.
요르고 란티모스 감독의 <더 랍스터>는 결혼과 연애에 관한 진실을 날카롭게 풍자한 영화다. ‘더 랍스터’의 공간은 커플이 안 되면 형벌을 받는 세상과 반대로 커플이 되면 형벌을 받아야 하는 두 개의 극단적인 공간이 마주 보고 있다. 첫 번째 공간은 커플이 안 된 솔로들은 커플을 연결해주는 숲속의 호텔로 들어가서 45일 동안 짝을 찾아야 한다. 짝을 찾지 못하면 동물로 변하는데 호텔에 들어가기 전 주인공이 선택한 동물이 ‘랍스터’다. 공교롭게도 ‘랍스터’는 자웅동체다. 호텔에서 짝을 찾는 동안 짝이 된 커플이 헤어질 조짐이 보이는 경우 운영진들은 커플에게 입양 자녀를 급하게 투입한다. 입양 자녀들이 커플의 균열을 막는 접착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