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아버지....
씹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
이 씹새끼야
이성복의 시 「그해 가을」
한때 이 시구절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폭로(?)한 적이 있다. 미안하지만 나의 아버지 그리고 이 땅의 아버지들은 귀가 간지러웠을 게다. 이성복 시인의 “씹새끼”는 충격이면서 후련한 한방이었다. 어디 고귀한 시에 상스럽게 욕설이야라고 생각했던 초기 문학청년 시절이었다. 폭력에 예술이 대항할 수 있는 건 “씹새끼”라는 욕설뿐이었고 우리는 폭력의 시대를 시로 대리만족 해야 했다. ’씹새끼‘의 대상은 가부장제부터 국가 혹은 조직사회를 가부장제로 강조한 공권력과 사적 권력까지 넓다.
최양일 감독의 <피와 뼈>를 보고 나는 방관자가 되고 말았다. 평소 마초에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나도 김준평이 휘두르는 주먹이 무서워 그만 입을 닫고 말았다. <피와 뼈>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관객까지 후려 패는 그런 영화다. 무서운 얼굴을 한 폭력에 양심도 정의도 꼬리를 내린다. 괴물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그에 맞먹는 연기를 보여 준 감독 출신인 기타노 다케시, 기타노 다케시를 위한 영화라 불러도 상관이 없는 <피와 뼈>는 윤리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김준평 앞에서 단정하게 설교하면 귓불이 얼얼하게 될 거다. 이 남자, 김준평, 흉포하다. 김준평은 한국식 아니 꼭 한국에만 울타리를 칠 수 없는 전근대적인 가부장제 아버지상을 보여준다. 나는 폭력에 전염되었는지 여인 잔혹사를 보고서도 신고조차 하지 않는다. 김준평 같은 잔인한 아버지를 묘사하는 전형적인 방법은 냉혹함 이면에 숨겨진 인간의 모습을 슬쩍슬쩍 내 비추는 게 기본이다. 자식들 앞에서 회초리를 대지만 잠이 든 어린 자식의 열무 같은 종아리를 어루만지는 눈물과 웃음을 끌어내는 기본 공식이다. 하지만 김준평, 시종일관 흉포하고 끝까지 밀어붙인다. 이 남자 왜 그렇지? 폭력의 흉측한 속살을 들여다보았다고 할까? 한번 빨려들면 양심과 정의가 순간 일시 정지되고 마는 무중력의 공간을 경험했다고 할까? 참고로 <피와 뼈>처럼 인물이 모든 미장센을 차지하는 영화들이 있다. <똥파리>가 대표적이다.
<피와 뼈>의 김준평처럼 폭주하는 마초 대통령들이 난리 치고 있다. 심지어 인기도 있다. 필리핀의 전대통령 두테르테는 지지율이 90%였다. 대통령의 무자비한 주먹질에 모두가 얼어붙은 푸틴의 러시아를 생각하면 마음이 짠하다. 러시아의 감독 안드레이 즈비아진세프의 최근 영화 <리바이어던>의 풍경은 냉대기후의 풍경만큼 을씨년스럽다. 한 도시의 시장이 마피아나 다름없는 폭력을 휘두르지만 소시민들은 아무런 힘이 없다. 웬만한 감독이라면 친절하게 희망의 흔적이라도 남기는데 <리바이어던>에서는 볼 수가 없다. 감독의 최근 작품 <러브리스>도 가차 없다. 이성복 시인의 ’씹쌔끼‘처럼 대놓고 털어놓을 수 없는 겁먹은 카나리아의 비명이 선택할 수 있는 건 알레고리다.
헐리우드의 히어로 장르가 인류에게 남긴 영향력은 참담하다. 위기 때마다 찾아오는 마초 권력들은 히어로처럼 취급받기에 십상이다. 트럼프는 말할 필요도 없고 중국의 시진핑, 터키의 에르도안 지금은 물러난 영국의 보리스 존슨, 브라질의 자이루 브르소나우, 일본의 아베. 젠더 감수성이 제로도 아니고 마이너스인 육식 대통령들의 등장은 몹시 불편하다. 그들은 결코 히어로가 아니다. 프랑스 혁명이 지난 지 300년이 지났지만, 봉건시대의 추억을 되새김질하고 싶은 마초 대통령들은 멸종을 앞둔 공룡들의 마지막 발악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마초 권력의 범람은 아직도 젠더지형이 위태하다는 알리바이이며 균형을 잡기 위해 더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역설한다.
최근에 본 <달러스 바이어스 클럽>은 에이즈 환자의 외로운 투쟁처럼 보이지만 내게 전경보다는 뒷배경이 더 다가왔다. 아직도 미국은 카우보이가 지배하고 있구나. 카우보이들의 연대는 결국 트럼프를 추대했고 대통령이 되는 건 필연적이었다. <달러스 바이어스 클럽>의 첫 장면은 소를 타는 로데오 장면이다. 가장 오래 버티는 자가 승리한다. 미친 듯이 날뛰는 소의 등에서 버티는 주인공의 모습은 주인공이 닥칠 미래를 보여준다. 단지 보안관만 없을 뿐이지 서부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걸 영화가 보여준다.
트럼프가 다시 재선에 도전했던 그해는 한국 대선보다 더 긴장하면서 지켜봤다. 어쩌면 미국의 우산 아래에 있는 반식민지의 현실 때문이다. 균형 감각이 전무한 일개 대통령의 판단력 때문에 세계가 난장판이 되는 카오스 같은 현실을 바라봤던 4년이 너무 힘들었다. 우리의 통일을 생각한다면 트럼프를 언급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세계 평화를 위해서 더 이상 공감받지 않는 기적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