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 '월가를 점령하라' 회고
‘하나의 유령이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 자본주의라는 유령이’
-영화 속 전광판에 나오는 문구
공중 부양을 해본 적은 없다. 하지만 대략 공중 부양의 느낌은 알겠다. 어린 시절 생떼 부린다고 키 큰 어른들이 나를 번쩍 들어 올렸을 때 발은 무기력하게 공중을 걷고 있었다. 영화의 주요 배경이 되는 리무진은 마치 무중력 공간의 우주선 같다. 자본의 심장인 뉴욕 월가를 부드럽게 미끄러지며 간다. 리무진 바깥은 월가를 점령한 시위대 때문에 시끄럽다. 리무진은 유령처럼 미끄러지며 간다. 그리고 동시에 대통령이 뉴욕 시내를 관통한다.
한때 10층 아파트에 산 적이 있었다. 그 아파트에서는 나는 숙면을 취할 수 없었다. 고층 아파트도 아닌데 내 몸은 땅과 벌어진 간격을 아쉬워했다. 가능한 높은 층보다는 낮은 층을 찾아다녔다. 13층 정도의 아파트에서 잔 적이 있었다. 몸은 다시 공중 부양의 느낌을 받았다.
2010년 학교 이동학습 때문에 필리핀에서 7개월을 머문 적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최저임금 정도 수준의 노동자였는데 필리핀에서는 의사 정도의 급여 수준이었다. 갑자기 중산층이 되어버렸다. 공중 부양이란 뭐랄까? 구름에 앉아 본 적은 없지만 마치 허우적거리는 느낌, 동작이 평소보다는 둔해지는 몸이 몽롱한 상태라고 할까나? 고작 140만 원 정도 월급에 갑자기 신분 상승을 한 나는 졸부가 되고 말았다.
하루에 몇백억을 주물럭거리는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코스모폴리스> 주인공 에릭은 가끔 공중 부양하는 나와 달리 늘 공중 부양하고 있다. 이미 거대 자본은 그의 감각을 빼앗아 갔다. 오로지 남은 감각은 돈을 주무르는 감각과 성욕뿐이다. 그는 시위대의 표적이 되어 살해의 위협을 받고 있고 월가는 자본의 탐욕을 비난하는 시위대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없이 오로지 이발을 하기 위해 경호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단골 이발소로 미끄러지며 간다.
주인공 에릭은 대화법을 모른다. 가끔 만나는 부인한테는 섹스만 요구한다. 소유하고 오로지 관찰만 할 뿐이다. 심지어 어느 화가의 그림이 걸려 있는 집 전체를 사들이는 계획도 세우고 테크노 레이브 파티가 열리는 극장도 인수한다. 그리고 테크노 음악에 녹아내린 채 흘러가고 있는 젊은 친구들을 물끄러미 본다.
월가 시위 2년 전쯤 나온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큐 <자본주의-러브스토리>는 이제 더 이상 자본의 탐욕에 버틸 수 없다는 제2의 공산당 선언과 닮았다. 이후 일어난 월가 시위는 브레이크 없는 자본주의에 대한 태클이었다. 물론 G7 회의 때마다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시위가 있었지만 2011년의 월가 시위만큼 강력하지는 않았다. 분노가 차올랐다는 표시다. 생뚱맞기는 했지만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어느 상업 민영방송국도 ‘최후의 제국’이란 다큐를 만들어 자본과 무관하게 살아가고 있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공개하기도 했다.
신자유주의는 오로지 효율과 경쟁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판타지에 갇혀 국가와 자본이 강력하게 결합한 돌연변이의 결정체였다. 우리도 판타지에 미끄러졌다. 감독은 계급의 총탄을 맞는 페르소나로 꽃미남 배우로 잘 나갔던 로버트 패틴슨에게 역할을 맡겼다. 영화 후반부에서 분노에 찬 노동자가 직설화법을 쓰는 장면이 나온다. 다행스러운 게 영화 전반에 배치되었다면 영화는 자칫 무산계급 푸념의 장이 되었을 뻔했다.
마이클 무어 감독의 마지막 장면은 접근금지 테이프로 월가를 결박하는 장면이 나온다. 마이클 무어 감독의 장기인 퍼포먼스지만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서민을 쥐락펴락하는 금융자본은 유배당하거나 단죄당한 적이 없다.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으로 시작한 2008의 금융 대공황은 무책임한 집 담보 대출에 저당 잡혔던 미국의 서민들을 집 밖으로 내몰았다. <다음 침공은 어디>에서는 국가 파산을 경험했던 아이슬란드는 미국의 모델을 본보기로 금융자본의 수장들을 유배하고 신분 상승에 발정 난 남성들의 탐욕을 견제하기 위해 어느 한쪽 성이 40%를 넘지 않는 고용평등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그래서 다큐 장면에는 리먼 브러더스가 리먼 시스터즈로 개명했으면 2008년의 카오스는 오지 않았을 거란 자조적인 농담으로 마무리한다.
*2011년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대규모 군중 시위. 2011년 9월부터 뉴욕을 시작으로 11월 30일, 경찰에 의해 해산될 때까지 공식적으로는 73일간 지속되었으며 세계적인 공조 현상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