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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아시스 Aug 27. 2016

봉숭아 물이 빠지기 전에

영화 :우리들'

‘우리들’은 첫 장면부터 마음을 흔듭니다.

피구를 하기 위해 뽑아가기를 하는 장면은 굳이 설명이 없어도 주인공 ‘이선’의 위치를 가늠하게 합니다. 혹시나 하고 뽑힐까 설레이던 이선의 표정은 체념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학급의 권력 서열 1위들이 자기 똘마니들을 챙기면서 애정을 과시할 수 있는 뽑아가기는 ‘우리들’에게는 잔인한 게임의 규칙이었습니다.

영화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 그만둔대’는 권력에 기대어 살던 똘마니들이 주체를 찾아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보여 주는 영화입니다. 반면에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늑대 아이’는 주체로 살던 주인공이 타자화 되어 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담담하게? 라고 한 건 감독의 의도는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뱀과 개구리를 잡으러 다녔던 천방지축 말괄량이 소녀가 학교에 들어가면서 갑자기 치마를 입고 조숙한 소녀가 됩니다. 반면 그녀의 동생은 주체를 지워버리는 학교를 떠나 숲으로 갑니다. 우리는 한때 주인공이었습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타자의 욕망을 대행하는 조연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키리사마가 동아리 활동 그만둔대’의 키리시마도 언제나 주목받는 서열 1위였지만 그는 또 다른 욕망의 타자일 뿐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는 영화 속 한 프레임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키리시마는 그의 똘마니들의 입을 통해서만 존재를 확인하게 됩니다.

성장영화는 주체를 허락하지 않는 삶에 대해 저항하는 형식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눈여겨 보면 모든 영화는 성장영화의 프레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타자에서 주체로 복귀하는 성장영화의 방식에 관객들이 호응이 높은 건 대리만족이거나 위로 혹은 열망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주체는 비어 있는 주체가 아니라 꽉 찬 주체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윤가은 감독은 단편영화 ‘콩나물’을 만든 감독입니다. 2013년 대전 청소년 영화제 예심을 보다가 발견한 영화였는데 같은 감독이란 걸 이번에 알게 됐습니다. 작은 소녀 아이가 콩나물을 사러 갔다가 골목을 헤매는 내용입니다. 그 골목길을 헤메던 작은 소녀가 초등 4학년 친구가 되어 학교라는 정글에서 미아가 되었습니다.

‘이선’은 허름한 빌라에 사는 친구입니다. 핸드폰도 없고 학원은 못 다닙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는 냄새나는 소녀입니다. 그리고 아파트 평수로 계층이 나누어진 학교에서 존재감이 없는 불가촉 천민에 가깝습니다. 이런 이선에게 전학 온 소녀 ‘지아’는 자기만의 친구가 생길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카메라는 시종일과 미디엄 샷 위주로 이선과 친구들의 표정을 담아냅니다. 초등판 영화 ‘파수꾼’이란 말이 돌았는데 닮았습니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특별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냥 익숙하고 평범한 이야기들이지만 당사자들에게는 스펙타클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를 지켜보는 담임선생님과 부모들은 그저 방관자 일 뿐입니다. 이런 이선에게 하루하루가 전투와 같습니다. 친구들의 한마디 표정 하나마다 지옥과 천국을 오갑니다. ‘우리들’은 평범하고 뻔한 진행을 보여주지만 살아 있는 캐릭터와 세밀한 일상의 묘사는 결코 진부하지 않게 만듭니다. 답답하게 더듬거리는 ‘이선’을 따라가는 게 쉽지 않지만 그래도 그녀를 포기할 수 없게 만듭니다. 그들에게 작은 교실은 시작이자 끝이기에 물러나지 않겠다는 이선을 응원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선의 고군분투에 뭉클하게 되는 건 아마도 제가 중학교 담임을 하면서 우리 친구들의 악전고투를 옆에서 지켜봐서 그랬을 겁니다.

 

매일 아침 일곱 시 삼십분까지

우릴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리 속에

모두 똑 같은 만 집어넣고 있어

막힌 꽉 막힌 사방이 막힌

널 그리고 우릴 덥썩 모두를 먹어삼킨

이 시꺼먼 교실에서만

내 젊음을 보내기는 너무 아까워

-‘교실 이데아’ : 서태지와 아이들

 

학교는 관계를 실험하고 배우는 좋은 공간이긴 하지만 때론 악몽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루 종일 갇아 놓고 지내니 온갖 방어기제들이 충돌하면서 마음과 마음으로 만나는 건강한 관계를 배우기보다는 가면을 쓰기 십상입니다. 왕따 현상은 더 이상 학교라는 공간이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공간이란 걸 증명하고 있습니다. 30명의 다양한 캐릭터들을 만나서 관계를 배우고 가기에는 핵가족 시대의 친구들에겐 너무 버겁습니다. (아-제가 다닐 땐 60명이었는데)

상영관을 들어가는데 초등학생 친구들이 몇몇이 보입니다. ‘내가 잘못 들어가고 있나?’ 그래서 다시 상영관 입구로 나가서 상영관 번호를 확인했습니다. 맞습니다. 아—초등학생들 이야기라서 부모님들이 데려온 모양입니다. 제 옆과 앞에 앉아 있었는데 20분 지나자마자 ‘몇 분짜리 영화야?’ 그리고 옆에 있는 엄마는 아들에게 열심히 영화 속 상황을 설명하는 걸 보니 진득하게 앉아 있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쉬운 영화가 아닐텐데---나가면서 딸과 함께 온 어머니가 딸에게 물어 봅니다. ‘너희 반에도 보라(서열 1위) 같은 친구 있지?’

제작자가 이창동 감독입니다. 이창동 감독의 도플갱어처럼 윤가은 감독의 꼼꼼한 연출이 돋보입니다. 교사들 그리고 학부모들이 보게 되면 치열한 전사로 살았던 그 시절을 복기하고 방관에서 관심으로 돌아설 수 있을까요?

 

*라캉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한때 모든 영화평들에 라캉이 출몰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까닭을 조금 알게 되는 건 모든 영화에는 성장의 서사가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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