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
[강신주의 다상담]이란 책은 강연을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총 3권입니다. 사랑/몸/고독, 일/정치/쫄지마, 소비/가면/늙음/꿈/종교와죽음 의 테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각각의 테마는 기조 강연을 우선 진행하고 선별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상담 형식으로 소통하고 그날의 테마를 정리하면서 마무리합니다.
말로 했던 강연을 글로 다시 정리한 책입니다. 같은 내용이지만 글로 접했을 때와 강연 실황을 소리로 전해 들었을 때의 느낌은 사뭇 달랐습니다. 정보의 전달만을 고려하면 큰 차이가 나지 않지만, 같은 테마라도 다가오는 울림의 지점은 차이가 있습니다. 소리로 들을 때와는 다르게 글을 통해서 읽어나갈 때는 그의 이야기를 나의 속도로 끌고 나갈 수 있다는 점이 좋습니다. 또한 그의 목소리의 높낮이가 직접적으로 전달되지 않고, 얼굴 표정을 볼 수도 없으며, 청중들의 반응은 괄호( ) 속의 '웃음'이라는 글자 정도로만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생각의 흐름을 나의 주관대로 끌고 나가기에 유리합니다.
기준
개똥철학이라도 가지고 사는 것과 그렇지 않은 삶에는 차이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사진을 찍고, 사진을 공부하고, 사진을 강의하면서 늘 '기준'에 대해서 고민합니다. '기준'을 이해하고 나면 최소한 기술적인 부문에서만큼은 어렵지 않습니다. 사진 전문가가 된다는 것이 마치 촬영할 때 발생하는 모든 변수에 대처하는 치밀한 경험의 축적과 개별 상황에 맞는 해결책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진은 많이 찍어봐야 한다고 하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무리 많은 영어 표현을 익혀도 영어가 잘 늘지 않는 이유와도 비슷합니다. 아무리 오랜 기간 동안 사진 생활을 했어도 '아마추어'라는 말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면 그런 이유입니다. '기가 막히게 사진 잘 찍는 아마추어 시네요'라고 상징적으로 말할 때가 있습니다.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잘못된 기준이라도 기준에 따라서 경험을 쌓아가야 합니다. 증거 없는 가설 같은 나만의 기준은 경험을 통해서 검증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만약에 잘못된 기준이라면 어긋나는 상황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기준점을 이동하면서 수정하면 됩니다. 하지만 기준 없이 상황에 따른 표면적인 현상을 암기하듯 경험해 나간다면 매 순간순간이 변수일 수밖에 없고, 암기한 것도 쉽게 잊힙니다. 그래서 사진이 어렵게 느껴집니다.
1권부터 3권까지 한 번에 읽어나가면 좀 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각각의 테마별 삶의 대처 요령이 제각각인 듯 보이고, 내담자의 질문은 매우 다양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삶의 기준을 올바르게 세운다면 확신을 가지고 삶을 살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준을 세우고 사진 생활을 해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강신주가 강한 어조로 자신 있게 독설로 상담을 진행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기준이 명확해서 일 겁니다. 기준을 세우는데 절대적으로 치열하게 고민한다면, 개별 변수들은 상대적으로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나만이 세운 기준으로 살아가다가 '어~ 이거 아닌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든다면 사진에서 노출 보정을 하듯이 기준점을 수정 보완하면 그만입니다. 기준이 없다면 수정 보완을 할 수조차 없습니다.
사진촬영을 할 때는 카메라와 촬영자 간의 역할 분담을 위한 촬영 모드(노출 모드)가 있습니다. 카메라가 모든 것을 알아서 해줄지 아니면 적정 노출을 위해서 반반씩 역할을 분담할지, 아니면 촬영자가 모든 것을 알아서 할지를 촬영할 때 결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오해가 발생합니다. M 모드(수동모드)로 촬영하는 것이 전문가 모드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알아서 해야 하는 촬영 모드이니 당연히 조작이 쉬울 리가 없습니다. 당연히 뭔가를 알아야 만질 수 있는 모드임에는 분명합니다. 하지만 기준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는 전문 촬영자는 M 모드를 꼭 필요할 경우에만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M 모드의 촬영은 촬영할 때마다 기준이 흔들기기 때문입니다. 명확한 기준이 필요합니다. 밝기를 측정할 수 없는 우리 눈을 대신해서 카메라는 빛의 양을 측정하는 센서가 있습니다. 카메라가 생각하는 적정 노출의 기준 또한 프로그램되어 있습니다. 카메라는 항상 적정 노출의 기준에 맞추어 촬영합니다. 지금 환경에서 그 기준이 나의 눈에 맘에 들지 않는다면 +1 혹은 -1로 노출의 기준점을 바꾸어 주면 됩니다. 이것이 사진에서 말하는 노출 보정입니다. 보정된 기준에 맞추어 다시 일정하게 촬영은 진행됩니다. 언제든 우리는 원점의 노출 기준으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하나의 기준이 명확히 서게 되면 그 기준을 이동해서 상황에 따른 유연한 대처가 가능하게 되고, 다시 원래의 기준으로 돌아가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가면/persona
전체 테마 중에서 조금은 더 구체적으로 말하고 싶은 이야기는 [가면]입니다. 기준에 대한 고민을 늘 하기 때문에 사진에 관한 기본적인 질문에 대해선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만의 정의'를 세워두는 편입니다. '좋은 사진이란 무엇인가?', '나에게 좋은 사진이란?', '사진이란 무엇인가?', '상업사진과 순수사진?', '기록사진과 보도사진?'등의 기준점을 스스로 정하고 검증해 나갑니다. 지금의 정의는 나중에 바뀔 수도 있습니다.
'사진은 가면(페르소나/Persona)이다'라고 '나만의 정의'를 세워두고 있었기에, [가면]이란 테마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가면을 쓴 상태가 '인격'라는군요. 인격(Personality)이라는 말이 가면(Persona/ 페르소나)에서 왔다고 합니다. 흥미롭습니다. 문명사회에서는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것이 인격을 갖춘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가면을 벗어 진정한 나를 보여주는 것에는 꽤나 용기가 필요할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틀을 만들고 통용되는 규칙들을 만들어서 살아가는 것이 문명사회라면 그 규칙과 틀에 맞는 가면을 써야 인격체로 인정을 받을 수 있겠네요. 그냥 민낯을 보인다면 사람 취급 못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면을 벗어 맨살을 보인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위험해 보입니다. 보호막이 없는 나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으면 쉽게 가면과 옷을 벗어 알몸을 드러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벗었을 때 알몸의 나를 수치스럽게 만들 수도 있고, 따뜻한 이불로 감싸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족에겐 한 번은 가면을 벗어 민낯을 보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진짜를 구별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입니다.
사진은 그림과 다른 재미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림 그리는 게 쉬워?", "사진 찍는 게 쉬어?"라고 학생들에게 물어보면 대부분 사진이 쉽다고 말합니다. 그림은 손재주가 있어야 할 것 같지만, 사진은 카메라가 대신해 주니 자동으로 찍으면 일단 뭐라도 찍을 수 있어 쉬워 보입니다. 하지만 사진을 조금 진지하게 접근하기 시작하면 만만치 않습니다. 왜일까요? 무엇인가를 표현하고 싶다면 그림은 일단 캔버스 위에 뭐라도 그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사진은 무언가를 반드시 찍어야 합니다. 찍는 순간 완성된 사진이 나오니 쉬운 것 같지만, 무엇인가를 찍어야 하기 때문에 찍을 대상에 대한 고민에 곧 직면합니다. 드디어 내 마음에 들어온 대상을 찍습니다. 이번엔 찍힌 사물의 본래의 의미가 나의 표현을 방해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대상은 약속된 의미가 있고 그 물건의 쓰임을 우리는 알아차리게 됩니다. 놀이터의 그네를 보고 헤어진 여인과의 추억을 떠올렸더라도 사람들은 그냥 놀이터에 있는 그네로 바라봅니다. 때론 자신의 추억을 떠올리겠죠. 나의 생각을 사진을 통해서 공유하고 싶다면 문제는 복잡해집니다. 반대로 나의 생각을 은밀히 감추어 기록하고 싶다면 사진은 제법 매력적인 도구입니다. 사람들은 "그네는 뭐 하러 찍었어?"라고 묻겠지만, 나에게 그 사진은 그때의 기억을 오감으로 떠오르게 만드는 중요한 힌트가 됩니다.
'다상담'에서 말하는 가면의 의미가 사진에서도 보입니다. 1. 가면을 쓰고 있는지도 인지하지 못하고 가면 쓴 얼굴이 나의 얼굴로 착각하는 작가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스스로 민낯이라고 생각합니다. 2. 전략적으로 가면을 썼다가 숨어서 가면을 벗는 이중생활의 작가도 있습니다. 3. 솔직한 민낯을 보이며 쿨하게 반항하는 작가도 있습니다. 세상은 때로 민낯을 보인 작가에게 가면을 쓰고 올 것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알몸보다는 유행에 걸맞은 패셔니스타를 요구하는 거죠. 1번은 그래도 스스로의 양심에 어긋나지는 않았습니다. 계룡산에서 도닦고 내려와서 만물의 이치를 스스로 깨쳤다고 착각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는 작가노트가 화려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감상자에게 자신이 깨달은 무엇인가를 알려주려고 부단히 애씁니다. 감상자들을 발밑에 두기도 합니다. 2번은 1번과 나타나는 현상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스스로가 거짓으로 위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본인은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디선가는 가면을 벗고 땀을 식히며 힘겨움에 한숨 내쉬는 행위를 하게 될 겁니다. 들키지 말아야겠죠. 3번은 작가노트가 짧거나 없습니다. 민낯을 보인 3번 작가가 진짜 예술가일 확률이 높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거나, 진짜 이거나! 하지만 3번은 최소한 자신을 속이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작가적 양심'입니다.
작가적 양심
강신주가 말하는 가면을 벗은 민낯은 바로 '작가적 양심'과 통합니다. 강신주가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예술가는 기표를 던지는 사람이고, 그 의미를 논리적으로 해설하는 것이 철학자의 역할이다.' 그 의미를 구구절절 잘도 설명해 내는 작가가 있다면 B급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도화된 의식세계 속에서 통용되는 언어로 사진을 설명해 낼 수 있다면 굳이 사진을 찍을 이유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진짜 사진의 민낯을 만나면 말로는 풀어서 설명할 수 없는, 해독할 수 없는 암호화된 이미지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나는 변명 같은 화려한 작가노트를 좋아하지 않습니다.